고공에 휘날린 무지개

칼럼

▲ 서이 퀴어동네 운영위원

서울퀴어문화축제 부스 준비에 한참이던 어느 날, 우리는 고공농성 투쟁3사인 서비스연맹 관광레저산업노조 세종호텔지부, 금속노조 한국옵티컬하이테크지회 및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와 연대하는 한 시민의 이메일을 받았다. 고공 3사 투쟁 사업장에는 500일 넘게 장기 고공농성 중인 한국옵티컬하이테크지회가 있는데, 국민 청문회 개최를 위한 동의수가 부족해 노동자의 벗과 퀴어동네가 운영하는 부스에 국민동의청원 홍보 포스터를 붙일 수 있냐는 정중한 요청이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에 흔쾌히 수락하며 연대의 차원에서 퀴어동네의 깃발 역시 고공농성 투쟁3사 행진트럭인 1번 차량을 따라가기로 했다. 그런데 해당 요청에 대해 검토를 진행하며 기시감이 들어 곰곰히 생각해보다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이미 서울퀴어문화축제에서 세종호텔지부의 해고자를 만난적이 있었던 것이다.

3년 전 수습노무사모임인 ‘노동자의 벗’ 이름으로 서울퀴어문화축제 부스를 준비하며 우리는 하나의 참여 이벤트를 준비했다. “나는 퀴어친화적인 직장을 원하는 000 입니다”라는 피켓인데, 공란에 본인을 소개하는 자유로운 문구를 넣어 인증샷을 찍을 수 있게 했다. 그 당시 찍은 수많은 인증샷 중에는 “나는 퀴어친화적인 직장을 원하는 (세종호텔 정리해고) 해고자 입니다”가 있었다.

2021년 12월9일 코로나19에 따른 경영위기를 이유로 돌입한 구조조정으로 해고된 세종호텔 해고노동자들은 지난 3년간 서울퀴어문화축제를 찾아줬다. 2023년에는 “피어나라 퀴어나라 세종호텔 해고노동자도 지지합니다”라는 피켓으로 연대하며 소소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러나 그 사이 해고노동자들의 상황은 악화했다. 2024년 12월께 중앙노동위원회에 이어 대법원 역시 해고가 정당하다고 판결함에 따라 고진수 세종호텔지부장은 스스로를 고공으로 내몰았다. 호텔 경영은 흑자로 돌아섰지만, 해고노동자들은 3년 넘게 일터로 돌아가지 못한 것이다.

한동안 잊고 살았던 세종호텔 해고자들을 서울퀴어문화축제에서 다시 만났다. 3년 전 노동자의 벗에서 퀴어동네로 모임을 발족한 뒤 다시 참여할 때까지 수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그 사이 고공농성 중인 사업장은 3개로 늘어나 나아지기는커녕 악화한 현실이 씁쓸하기만 했다.

그러나 3년 사이의 변화는 나쁜 것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부스 곳곳에 한국옵티칼하이테크 청문회 개최를 위한 국민동의청원 홍보 포스터가 붙어있었고, 서울퀴어문화축제 입구 한켠에서는 국민동의청원을 위한 홍보가 한창이었다. 축제의 메인인 퍼레이드에서는 고공 3사의 투쟁트럭이 선두에 섰다. 서울퀴어문화축제에서는 매해 가장 상징적인 단체의 차량이 퍼레이드 선두에 서는데, 올해는 그 자리에 “퀴어와 노동자의 연대”를 상징하는 고공 3사의 차량이 선 것이다.

퀴어퍼레이드의 행진 역시 생소하지만 뜻깊었다. 선두 트럭에서는 퀴어와 엘라이들의 심금을 울리는 대중가요가 아닌 해고노동자들의 복직을 기원하는 민중가요가 울려 퍼졌다. 퀴어퍼레이드 행렬에는 한화빌딩 앞에서 김형수 한국옵티컬하이테크지회장이 춤으로 환영의 인사를, 세종호텔 앞에서는 약 3분간 정차해 고진수 지부장에게 연대의 뜻을 전했다. 퀴어와 해고노동자가 고공에서 만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연대에 힘입어 국민동의청원은 단 이틀 만에 1만 명 이상이 동참해 결국 지난 16일 국회 회부 기준인 5만명을 넘겼다. 광장에서의 연대가 고공 위의 삶을 흔든 것이다.

퀴어문화축제는 더 이상 ‘퀴어’만을 위한 축제가 아니다. 서로 다른 존재들이 서로를 향해 깃발을 들 수 있는 정치적 광장이다. 해고노동자의 고공 위 외침과 퀴어퍼레이드가 교차하는 이 만남은 우리가 더 넓은 연대를 상상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고공의 깃발과 광장의 무지개가 함께 나부낄 때 변화는 시작된다. 고립된 싸움은 없다. 더 많은 이들이 서로의 광장에, 서로의 고공에 함께 한다면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퀴어노동법률지원네트워크 (qqdong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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