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과 가족

칼럼

▲ 여수진 공인노무사 (퀴어동네)

내가 태어난 때는 ‘둘만 낳아 잘 기르자’의 시대였다. 앞치마를 두른 엄마가 아이들과 함께 양복 입고 출근하는 아빠를 배웅하는 장면으로 ‘4인 정상가족’의 모습이 홍보됐다. 아빠는 양복이 아닌 작업복으로 출퇴근했으며 갑자기 늦둥이가 등장했고 명절에 가끔 싸움이 나던 우리집은 TV에서 보던 다정한 ‘모범가족’의 모습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자라면서 알게 되었다. 회사원 말고도 아버지들의 직업은 무척 다양하고 가족의 모습도 제각각이라는 것을. 내 동생보다 더 어린 늦둥이가 있는 친구, 딸 부잣집 막내, 외동이라 동생이 있는 나를 부러워하는 친구, 엄마랑 단둘이 사는 친구, 할머니 손에 자란 친구, 이사를 자주 다니는 친구, 아픈 가족이 있는 집 등 실제 삶의 모습과 사연들을 알게 되며 조금씩 어른이 됐다.

원가족에서 독립할 나이를 지나자 ‘누가 누구와 사는가’에 대한 주변의 모습은 더 다채로워졌다. 남녀가 함께하지만 결혼은 하지 않는, 결혼했지만 아이는 낳지 않는, 3명이 함께 사는, 부부간 국적이 다른, 모녀가 함께 아이를 키우는, 동성 파트너와, 비혼 자매끼리,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사람들이 있고 가족관계도 부모와 자식이 절연한 집이 있는가 하면 형제자매가 매일 안부를 나눌 정도로 살가운 집도 있고 그야말로 제각각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가 인정하는 가족의 범위는 ‘둘만 낳아 잘 기르자’ 시대에서 크게 나아가지 못했다. 그중에서 명절은 ‘가족과 함께’라는 강력한 구호처럼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제도로 기능한다. 이성 법률혼 부부와 자녀로 이루어진 가족 체계와 성별 이분법을 바탕으로 큰딸, 장남, 사위, 아주버님, 도련님, 아가씨, 이모 등 각자의 역할을 전 국민이 어느 때보다 충실하게 수행하게 되는 날이다.

테두리 밖에 있는 존재들조차 예외는 없다. 내가 함께 살기로 선택한 사람과 헤어져 추석 선물을 들고 각자의 ‘정상가족’으로 뿔뿔이 흩어진다. “송편을 잘 빚어야 예쁜 딸을 낳는다”에서부터 “언제까지 그렇게 살거니” 같은 차별과 배제의 밥상을 묵묵히 감내하고 돌아오면 연휴 마지막쯤, 동거하는 파트너나 같은 처지의 ‘비정상’ 친구들과 만나 진짜 명절을 함께 보내고 싶은 사람은 누구인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또 다른 명절 식사를 한다.

다양한 가족 형태가 이처럼 배제되고 감추어진다고 해서 우리 사회에 없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2023년 통계에 따르면 결혼이나 혈연과 무관한 비친족끼리 함께 사는 사람이 100만명을 넘어섰다. 역대 최고 수치에 증가 속도도 무척 빨라지고 있다. 반면 부부와 자녀로 이루어진 가족의 비율은 가파르게 감소해서 이제 3~4인 가구보다 1인 가구의 수가 더 많아졌다. 국민의 70%가 혼인·혈연관계가 아니더라도 생계와 주거를 공유하면 가족이라고 답변하기도 했다.(2020, 여성가족부 ‘가족 다양성 국민인식조사’)

퀴어의 가족이야기, 특히 커밍아웃 경험담을 들으면 ‘누가 누구와 사는가’에 대한 문제는 비단 성소수자나 젊은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가족에게 더 중요한 문제로 보인다. 자식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 힘들어 자식과 불화하거나 절연하고, 자식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인 파트너가 어떤 사람인지 만나보지도 못한 채 평생 내 자식이 불행할 거라고 믿으며 늙어가는 부모들의 모습이 안타깝다. 가족의 커밍아웃에 환대로 답한다면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돌봐 주고, 명절을 함께 나눌 사람이 더 많아지고 관계가 더욱 풍성해질 텐데 말이다.

“며느리가 남자라니! 사위가 여자라니!”는 십수 년 전 등장한 혐오의 구호였다. 이제 바뀐 시대에 필요한 것은 (퀴어문화축제에 등장한 어떤 구호처럼) “여자 사위? 너무 기대됨, 남자 며느리? 오히려 좋아!”라는 태도다. 다양한 관계를, 서로 다름을 가족 안에, 내 주변에, 직장에, 내 삶에 받아들이자. 이는 성소수자만이 아니라 정상가족 틀에 억압된 채 ‘누구와 함께 늙어가고 의지하며 누구를 돌보며 살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는 우리 모두를 해방시킬 것이다.

퀴어노동법률지원네트워크 (qqdong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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