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년 8월 한 노동자가 기계에 엄지손가락이 말려 들어가 절단 사고를 당했다. 그는 접합 수술을 위해 병원을 찾았지만 스무 번 넘게 치료를 거절당했다. 약 13시간 만에 그는 한 개인병원에서 수술할 수 있었지만, 엄지손가락의 기능을 상당 부분 상실했다.1) 그는 HIV 감염인이었다.
노동자가 건강을 지키는 데에는 혼자 노력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일하다 다치지 않기 위해 주의를 기울여도 업무량과 속도에 의해 사고는 발생할 수 있으며, 아프기 전에 쉬려고 해도 아파도 마음대로 못 쉬는 게 현실이다. 그렇기에 산업안전보건법은 사업주의 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누군가에게 고용돼 종속적인 노동을 제공하는 자의 건강은 그를 고용한 주체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사업주가 의무를 다하지 않아서, 또는 의무를 다했더라도 업무상 사고나 질병은 발생할 수 있으며, 이때 국가는 노동자에게 적절한 치료와 노동력 상실에 대한 보상을 제공한다. 한 노동자의 건강은 공동체가 함께 지키는 것이다. 그 공동체가 차별과 혐오로 오염돼있다면, 구성원 그 누구도 온전히 건강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질병을 둘러싼 은유들은 어떤 질병에 낙인을 찍으며, 좀 더 나아가서는 질병을 앓는 사람들에게 낙인을 찍어 놓는다.” – <은유로서의 질병> 수전 손택 지음
수전 손택은 질병이 단순히 아픈 증상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어떤 질병은 질병을 앓고 있는 환자에게 수치심을 불러일으켜 오히려 질병을 치료하는 데 악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그는 ‘에이즈’를 예로 들면서 ‘감염병’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사회에서 재구성되는지, 그리고 감염병을 지닌 몸을 어떻게 대하는지 설명한다. 감염병은 국가적 차원에서 무찔러야 하는 적으로 여겨지고, 보균자의 몸은 전투가 벌어지는 전쟁터로 여겨진다. 동시에 질병의 보균자는 타인에게 전파할 가능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잠정적 가해자로 여겨져 사회로부터 격리된다. 그 과정에 감염인의 인격은 제거되고, 종종 모두를 위험에 빠트린 ‘빌런’처럼 취급되기도 한다. 코로나19 초반에 슈퍼전파자, 이태원, 종교단체 집단감염자 등 특정 감염인들을 비난하고 공격했던 것과 유사하다. 그러나 감염병은 혼자 있으면 발생할 수 없다. 사회에서만, 즉 우리가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 질병의 형태가 감염이다. 그런 감염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고, 그를 격리한다고 치료되거나 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감염병에는 ‘징벌’ ‘죽음’ 등 추가적인 은유들이 더 붙기도 하는데, 대표적인 질병이 HIV 감염이다. 질병관리청의 자료에 따르면 2021년 보건당국에 HIV 감염이 확인된 내국인의 95.5%가 치료제를 복용하고 있으며, 이들 중 96.0%는 바이러스가 억제된 상태다. 즉, HIV의 전파성은 상당 부분 통제되고 있고, 질병관리청은 HIV 감염을 이제 고혈압이나 당뇨병 같은 만성질환과 다를 바 없다고 밝히기도 했다. HIV를 가진 채 건강한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HIV는 종종 죽음을 연상시키고, 감염인의 삶은 지워진다. 충분히 건강한 HIV 감염인을 아프게 한 것은 그의 감염 사실이 아니라, 질병에 덧씌워진 편견과 혐오이다.
WHO가 코로나 팬데믹 종식을 선언한 지 1년이 돼 간다. 우리는 대부분 누군가에 의해 감염당했고, 누군가를 감염시키기도 했다. 코로나 19바이러스는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 기존의 감염병에 대한 은유를 사용하면 우리는 적과 함께 사는 방법을 찾은 것이다. 감염병을 적으로 여기고 절멸시키는 전략으로는 감염병을 막아낼 수 없다. 사람이 없어져야 바이러스도 절멸할 테니 말이다. 감염병을 적으로 여기지 않고, 보균자를 전쟁터로 여기지 않아야 한다. 감염의 전제조건은 ‘우리’이고, 우리의 전제조건은 ‘서로’다. 서로가 있기에 우리는 감염할 것이고, 감염될 것이다. 편견과 혐오를 벗고, 감염병을 마주할 때 비로소 우리는 서로를 살릴 것이다.
퀴어노동법률지원네트워크 (qqdong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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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휘말린 날들>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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