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요일 오전, 업무와 관련한 미팅이 있었다. 거의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고, 앞으로 계속 볼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이었다. 쉬는 시간에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남자친구 있어요?”
1번. “하, 남자친구요? 어제 여자친구랑 헤어졌는데요?”
100퍼센트 진실이었고, 가장 먼저 떠오른 문장이기도 하다.
2번. “하. 어제 헤어졌는데요?”
절반 정도 진실이려나. 아님 100퍼센트 거짓말일지도.
3번. “아니요. 남자친구 없어요”
어쩌면 진실… 100퍼센트 거짓말은 아니니깐.
“예? 아, 아니요. 남자친구요? 없어요. (이게 가장 적절한 대답이 맞을걸요?)”라고 대답했다. 거짓도, 진실도 아닌, 아무 의미 없는 문장이었다. 미팅은 오후까지 이어졌고, 좀처럼 집중할 수 없었다. 3번이 분위기를 망치지 않고, 앞으로의 관계도 망치지 않는 가장 적절한 답이라는 걸 알았다. 그런데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 점심을 먹으면서도 답답했다. 얘기하고 싶었다. 오전에 무례한 질문을 받았고, 순간 너무 화가 나고, 슬프고, 당황스러웠으며, 머릿속에 최악의 시나리오들이 동시에 펼쳐졌다고. 홧김에 여자친구랑 헤어졌다고 이야기했다가 사람들이 날 피하고, 대표 귀에 들어가서 잘리고, 업계에서 매장되는 상상을 했다고. 너희들조차 내 편이 안 돼줘서 정말 혼자라고 느껴졌고, 그게 너무 무서워서 그냥 입을 다물고 이도 저도 아닌 아무 말이나 해버렸다고. 그런데 말하지 못했다. 아무도 내가 퀴어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난 지금까지 일하면서 한 번도 커밍아웃을 해본 적이 없다.
커밍아웃(coming out)은 스스로 자신의 성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커밍아웃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다시 갇히고, 새로운 벽에 부딪히기도 하며, 어떤 때에는 벽장 안에 머무르기를 선택하면서 계속 반복해 나가는 과정이다. ‘2021년 청년 성소수자 사회적 욕구 및 실태조사 자료’ 따르면 88.2%의 성소수자가 평생 누군가에게 한 번 이상 커밍아웃을 했다고 응답했다. 이때 성소수자들은 직장에서 본인의 성정체성을 드러내기 가장 꺼려하며, 13.2%의 성소수자만이 직장에서 커밍아웃한 경험이 있었다. 10명 중 8명의 성소수자 노동자는 다시 벽장에 갇힌 채 일을 하는 것이다.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을 항상 받아요”
“상사가 결혼에 대한 훈계를 하거나 남자를 소개시켜 준다고 할 때 ‘아주 멋지고 예쁜 여자친구가 있거든요!”라는 말을 할 수 없어서 너무 답답해요.“
“(젠더퀴어*인 나를) 당연히 여자라고 전제하고 이야기할 때 불편해요.”
세상은 여전히 젠더 이분법과 이성애 중심주의가 지배한다. 우리가 속한 일터,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 역시 그렇다. 직장 내 화장실은 대부분 두 개의 성별로 구별돼 있고, 일상적으로 특정한 젠더 표현을 강요받고, 이성애자임을 전제로 친분을 쌓는다. 그곳에서 우리는 존재가 지워지거나, 거짓말쟁이가 된다. 어느 날은 ‘그래, 먹고사는 게 다 이렇지. 남들도 다 힘들게 돈 벌겠지’하며 적당히 넘어가진다. 근데 어떤 날에는 견딜 수 없게 화가 나고, 슬프고, 답답하고,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다.
일하면서는 커밍아웃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노동자인 나’와 ‘퀴어인 나’를 구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업무와 무관한 사적인 영역이라고 생각하고 꾹, 입을 닫으면 괜찮을 줄 알았다. 아니었다. 무례한 질문을 받았을 때 친한 동료들과 함께 욕하고 싶고, 애인이랑 헤어진 다음 날 주말에 일을 하는 게 너무 슬프다며 위로도 받고 싶었다. 그러니깐 직장 동료와 친한 친구가 되지는 않더라도, 완벽한 타인으로만 지내고 싶지는 않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안녕을 확인하고, 함께 일하고 싶다. 실제로 성소수자들이 직장에 원하는 가장 큰 변화는 성소수자 인권 교육, 차별 구제제도 마련, 평등한 복지 혜택 이런 것이 아니라 커밍아웃할 수 있는 분위기다. <<‘2021 청년 성소수자 사회적 욕구 및 실태조사’에 따르면 직장에 원하는 게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61.6%의 성소수자가 커밍아웃할 수 있는 분위기를 원한다고 응답했다. 이어 성소수자 인권침해 차별에 대한 구제절차나 기구 존재(49.5%), 직장 내 성소수자 인권을 위한 교육프로그램(36.9%), 나의 파트에 대한 사내 복지 적용(27.4%) 순이다.>>
누구에게라도 커밍아웃할 수 있다면, 그게 단 한 사람일지라도, 조금은 숨이 편해질 것 같다. 주말에 친한 동료를 집에 초대했다. 집은 당연하게도 퀴어동네 포스터와 각종 무지개들로 꾸며져 있는 내게 가장 안전한 공간이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동료들에게 커밍아웃할 계획이다. 잘 들어줬으면 좋겠다.
퀴어노동법률지원네트워크 (qqdongne@gmail.com)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별의 구분에서 벗어난 그 밖의 성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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