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벽에 최대한 붙어있다. 마치 벽의 일부가 된 것처럼. 지하철이 들어오고, 우르르 사람들이 내린다. 순식간에 100명의 사람을 지나서 지하철 위에 올라탄다. 좌우로 고개를 돌리며 구석진 공간을 찾으려고 애쓴다. 모서리를 찾아 들어가 몸을 기댄다. 빨려 들어가는 듯하다.
서울에 올라와 처음으로 지하철을 탔을 때의 감각이다. 지하철의 속도는 내가 실제로 본 어떤 것보다 빨랐고, 역 안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가득했다. 눈을 돌릴 때마다 가득 찬 얼굴들과 두 눈에서 느껴지는 시선들 때문에 자꾸만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무서웠다. 사람들의 얼굴에 떠오르는 너무 많은 감정과 생각들을 소화하기 어려웠다. 무시할 수도 없었다. 언젠가부터 사람들의 얼굴을 보지 않는다. 사람의 얼굴을 지우고, 표정을 지우고, 하루를 지운다.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사람들에게도 ‘난 지워지겠구나’ 싶어서 조금은 자유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10대 때 꿈꿔왔던 도시의 자유로움이라는 건 결국 익명성에 기대어져 있구나 싶었다. 익명성 안에서 난 ‘덩어리’처럼 느껴지고, 그 안에서 자유로움을 느낀다. 출근길에 파트너와 손을 잡고 서로의 몸에 기대어 사랑을 속삭여도, 아무도 알아채지 않는다.
퇴근 후 파트너와 함께 동네 시장에서 장을 봤다. 자주 가는 두부 가게 아저씨가 오랜만이라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는 파트너를 향해 남자친구냐고 물었다. 순간 당황했다. 난 “아뇨, 애인이에요.”라고 답했고, 파트너는 조용히 있었다. 어려웠다. ‘아뇨. 여자친구예요’라고 답했어야 했을까. 내 정체성뿐만 아니라 파트너의 정체성까지 알려지는 일인데 싶었다. 혼자 있었을 때 남성으로 패싱됐다면 가만히 있지 않았을 파트너가 침묵하고 있었던 것도 마음에 걸렸다.
익명성. 어떤 행위를 한 사람이 누구인지 드러나지 않는다는 의미다. 여기에는 확실한 자유로움이 있다. ‘레즈비언 걔’에서 ‘레즈비언 64316435’이 된다는 건 마치 움츠러들어 있던 몸을 크게 기지개를 펴는 일처럼 느껴졌다. 동시에 익명성은 위험하고 불안했다. 언제 깨질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얼음판을 걷는 기분이기도 했다. 그리고 외로웠다. 기회가 된다면 서로의 얼굴을, 표정을, 하루를 알아채고 싶었다. 그런데 다시 ‘걔’로 돌아갈까봐 두렵다. 경멸과 혐오의 대상인 걔.
“커밍아웃과 아웃팅 사이의 수많은 스펙트럼, 즉 공간상에서 자신을 얼마만큼 드러내고(혹은 강제로 드러내지고) 또 감출 것인가(혹은 타의로 감춰질 것인가)의 전략은 성적 반체제자들의 일상생활과 생존에 직결되는 문제이다. 집, 거리, 학교, 직장, 화장실과 같은 여러 공간들에서 성적 반체제자들은 매순간 드러냄(드러내지기)과 감추기(감춰지기)의 경계 사이에 있다.”(김현철(2015) 성적 반체제자와 공공 공간: 2014 신촌/대구 퀴어퍼레이드를 중심으로, 서울대 교육학석사 학위논문)
누구에게 얼마나 드러낼(드러내질) 것인지에 대한 건 익명의 관계에서는 필요치 않게 느껴진다. 어차피 고유한 존재로 인식되지 않으니깐. 그런데 조금이라도 상대방을 고유한 존재로 인식하면 그때부턴 늘 그 경계에서 고민할 수밖에 없다. 두부가게 아저씨에게도 고민이 드는데, 하물며 매일매일 출근해서 함께 일하는 동료에게는? 아무리 ‘이 사람은 친구가 아니야’, ‘그냥 덩어리처럼 일하자’ 해도 누군가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고 그 사람이 고유한 존재가 되는 순간, 자꾸만 나도 그 사람에게 고유한 존재가 되고 싶은 욕망이 올라온다. 들려주고 싶고, 가닿고 싶다. 연결되고 싶다.
드러냄과 드러내지기. 그리고 숨기기. 이 사이를 끊임없이 넘나든다. 익명의 존재로 있고 싶은 마음과 고유한 존재로 관계 맺고 싶은 마음. 이 모든 것들이 한 사람의 몸 안에서 동시에, 폭발적으로 일어난다. 참지 못하고 몸 밖으로 삐져나올 때도 있고, 아예 몸이 산산조각 나서 흩어져버리기도 한다. 조각을 모아 다시 몸을 이룬다. 새로 이어붙인 몸으로 출근길에 오른다. 동료와 인사를 나누고, 옆자리에 있는 무지개 플래그를 보면서 이야기하고 싶은 욕망이 올라온다. 다시 부서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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