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내 책상이 유난히 노동법 책으로 어지러웠던 날이다. 집에 손님이 왔다. 함께 식사를 마친 손님은 재미있는 이야기, 이른바 ‘잼얘’를 기대하는 얼굴로 노동법 책을 가리키며 물었다.
“노동법이 뭐죠?”
이윽고 적막이 흐르니 손님은 질문을 바꿨다.
“노동법은 어떤 학문이죠?”
안 그래도 나는 노동법이 낯설다. 노동법을 공부할 때면, 민법이나 헌법을 들여다볼 때와는 다른 느낌이 든다. 이날따라 노동법이 자아내는 매캐함이 뚜렷이 느껴져서 이를 두고 차마 어떤 학문이라 단정할 수 없었다. 대신 손님에게 노동법의 탄생 배경을 늘어놓으며 노동법이 무엇인지 같이 생각해 보기를 제안했다. 노동법은 그 기원이 비교적 명확하다. 기원전이나 고대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최초의 노동법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19세기 영국에서 제정된 공장법이나, 독일에서 제정된 사회보험법 등을 꼽을 수 있겠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자본주의의 안정적인 유지라는 목적과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데에 있다. 근대의 인류는 산업화를 통해 전례 없는 속도의 발전을 이루며 잔혹한 경쟁사회를 맞이했다. 무한한 사적자치와 계약자유의 원칙은 높은 생산성을 목숨으로 지탱하던 노동자들의 재생산까지 집어삼켰다. 이렇게 위태로워진 사회 속에서 자본과 노동의 타협을 위해 고안된 것이 노동법이다. 그러니 이를 두고 단순히 학문이라고 할 수 없고,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 같은 고대 학자 이름을 빌려 그럴싸한 한 줄 정의를 내놓기에도 구색이 맞지 않는다. 노동법은 산업혁명기 공장 기름과 소년공의 땀을 거름 삼아 탄생했고, 지금껏 매연과 분진을 마시며 자라왔을 뿐이다. 인간사회의 보편타당한 도덕률이나 천부적 가치를 천명하기 위한 자연법이랑은 그 태생이 다르다. 쓸모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는 거창한 철학이나 정의에 도달하려는 진리 탐구 대신 노사갈등의 효율적인 봉합과 노동력의 재생산을 위한 이론축적에 최선을 다해야만 했다. 그래서 노동법은 그 젊은 나이에도 우리 사회에 많은 것을 바쁘게 제공해 왔다. 수많은 아동노동자들을 탄광에서 건져내고, 노동자들의 근로조건과 임금을 지켜주며, 노동자들이 자치적으로 단결할 수 있는 권리도 보장해 줬다. 그러나 이런 면모만을 보고 노동법이 오로지 노동자들의 권익과 삶의 질만을 위해 신하는 존재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 탄생 배경을 들여다보면 알 수 있다. 노동법은 노동자들의 손에 죽창 대신 작업 도구가 계속 붙들려 있기를 원하는 자본가들의 안심과 영달에도 이바지했으리라.
“그래서 노동법은 톱니바퀴의 윤활유 같은 거예요. 양피지에 쓰인 학문 같은 이미지는 아니죠.”
나의 장황한 설명을 들은 손님은 잠시 뒤 질문을 이었다.
“그럼 노동법은 역할을 다하면 필요가 없어지게 되나요?”
이 질문에는 바로 대답할 수 있었다. 언젠가 해본 적 있는 생각이었다. “만약 모두가 노동자인 세상이라면, 노동이 두렵지 않은 세상이라면 노동법은 필요하지 않겠죠.”
“차별금지법하고 똑같네요? 차별이 없는 세상이라면, 차별금지법 만들겠다고 이렇게 고생할 필요 없을 테니까요.”
“맞아요. 그런데 차별금지법은 아직 있지도 않다는 게 문제지요.”
나는 손님에게 차별금지법 얘기도 하나 해 줬다. 미국에서는 2019년에 전국적으로 동성결혼이 허용되었지만, 차별금지법은 아직 제정되지 않은 주가 많다. 이런 주에서는 성소수자 노동자가 동성배우자와 결혼은 할 수 있었을지언정 동성결혼을 이유로 직장에서 해고당하는 일도 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성소수자 노동자에게는 차별금지법도 노동법의 일종이군요?”
손님과 나는 시선을 노동법 책으로 다시 옮기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노동법도 차별금지법도 절실한 세상이다.
댓글
타인을 비방하거나 혐오가 담긴 글은 예고 없이 삭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