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 성소수자 활동가의 명복을 빌며

칼럼

▲ 김시운 공인노무사(퀴어동네 부대표)

얼마 전, 동료 성소수자 활동가의 부고를 들었다. 기껏해야 대화를 몇 번 나눈 사이였고, 그의 삶을 옆자리에서 다독일 만큼 가깝지는 않았다. 그래도 활동이 겹쳐 오가며 근황을 접했고, 집회와 기자회견에서 하는 발언을 들으며 응원했기에 충격이었다. 고인은 삶의 마지막 바로 전날에도 소셜미디어(브런치)에 글을 남겨 많은 이에게 트랜스젠더의 앨라이(ally)가 돼 달라 촉구했다. 그가 남긴 글이다. “언제나 어디서나 소수자였고, 누구를 만나든 그 사람에겐 내가 최초의 트랜스젠더였다. (…) 주변에 있는 트랜스젠더들을 돌아보고 살핌으로써 외롭게 혼자 두지 않는 것. 어쩌면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감히 고인의 삶과 죽음에 섣불리 의미를 붙이고 싶지는 않다. 다만 그의 명복을 빌면서 성소수자, 특히 트랜스젠더를 향한 한국 사회의 차별과 억압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되새기지 않을 수 없다. 국가와 사회가 보장하지 않는 인권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 애써 용감해지고자 노력하지만, 삶 내내 지난하게 버텼을 고독과 울분의 깊이를, 그 부당함을 곱씹어본다. 성 정체성, 성적지향을 이유로 성소수자를 차별하는 사회에서 어떤 이는 몸부림치며 살아남지만 때때로 어떤 이는 삶을 포기하기도 한다.

성소수자는 차별과 혐오가 만연한 사회와 일터에서 노동하며 일상의 생존투쟁을 수행한다. 정체성을 숨기기 위한 일상적인 거짓말로 정신적 긴장도가 높고, 미세차별로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직장내 인간관계나 조직몰입도, 경력경로에 악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성소수자가 아닌 사람들보다 높다. 하물며 성소수자가 아닌 노동자도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 소외를 겪고 착취당하며 ‘먹고사니즘’에 시달리는데, 성소수자는 본인의 정체성이 페널티가 되기 쉬운 일터에서 밥 벌어 먹고살기 위해 생존을 위협하는 이중, 삼중의 장벽과 싸워야 한다.

더 나아가 트랜스젠더나 젠더퀴어 당사자는 성별표현과 다른 주민번호 등의 인적사항이나, 지정성별과 다른 옷차림, 외모 등으로 일터의 문턱조차 넘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빈번하다. 실제로 2020년 국가인권위원회 트랜스젠더 실태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57.3%가 이 같은 이유로 구직활동 자체를 포기한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노동자로서 삶을 잘 꾸려가려면 일터에 진입하는 것부터가 필수 관문이다. 그런데 업무와 무관하고, 본인 능력으로 바꿀 수도 없는 성 정체성을 이유로 차별받는 트랜스젠더, 젠더퀴어 노동자는 일터 진입부터 높은 문턱을 넘어야 한다. 따라서 성소수자에게 ‘인권’은 더더욱 생존의 문제이며 먹고사는 문제, 그 자체가 아닐 수 없다. 한 마디로 인권이 밥 먹여준다.

그런데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지난 2일 한국교회총연합과의 면담에서 동성혼 및 차별금지법에 대해 “먹고사는 문제들이 충분히 해결되는 게 지금은 더 급선무”라며 “사회적인 대화, 타협이 충분히 성숙된 다음에 논의해도 되겠다”는 처참한 인식을 보였다. 사회적 합의를 만드는 주체로서 거대정당의 지도자가 무슨 역할을 하고 있는지는 둘째 치고, 동성혼 및 차별금지법에 나날이 늘어가는 찬성 여론에 발맞추지 못하는 낡고 무능력한 행태다. 먹고사는 ‘중요한’ 문제가 별도로 있고, 소수자의 인권 문제를 그와 분리하며 시간이 날 때 논의해도 상관없는 것, 덜 중요한 것으로 축소하는 것은 성소수자의 삶을 너무 모르고 하는 무식한 말이다. 얼마나 더 많은 성소수자가 삶을 포기해야 성소수자의 인권이 ‘먹고사는’ 문제가 될까.

“인간을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사회 구조에 대해 함께 싸워나갔으면 좋겠다.” 고인이 마지막 글, 마지막 문단에 남긴 문장이 가슴을 때렸다.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각자의 자리에서 따로 또 같이 모여서 투쟁하며 살아간다면 비록 지금 당장은 아닐지라도, 언젠가 고인의 뜻이 실현된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 부디 평안을 찾길 진심으로 바란다.

퀴어노동법률지원네트워크 (qqdong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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