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족과 함께 살려면 나를 완전히 버려야 해” 나는 생생히 기억한다. 분노와 서러움에 치를 떨던 친구의 목소리를. 동성애인이 있다는 걸 부모님께 들킨 친구는 끔찍한 언어폭력에 시달렸고, 본가에 사는 조건으로 이성애자로 살 것을 맹세하는 ‘이성애 각서’를 종용받았다. 경제적 독립이 어려웠던 친구는 그 각서에 사인한 뒤 모멸감에 몇 달을 끙끙 앓았다. 홍석천은 되는데, 내 자식이 성소수자로 살면 안 되는 주요 골자는 혐오의 손가락질에 상처받을 자식의 삶이, 혼자 외롭게 고립되어 죽을 자식의 노후가 걱정돼서였다.
이런 걱정은 친구 부모님이 발 딛고 있는 세계로 한정하면 일면 타당하다. 그들은 똑같이 사람으로 살아 숨 쉬는 성소수자의 생생한 삶을 옆자리에서 목격한 적이 없다. 그들이 자식의 삶을 조금이라도 이해해 보려고 인터넷 검색을 하면 자극적인 거짓 혐오 글이 판을 치고, 성소수자의 존재를 찬반 대상으로 격하하는 양비론이 유력 미디어에 등장한다. 그들이 지지하는 ‘나중에 정치’ 민주당은 기독교 혐오세력에 굴복하고도 부끄러움이 없다. 부모님이 그 모든 혐오를 만든 것은 아니지만, 자식의 ‘나답게 사는 삶’을 부정함으로써 혐오에 무거운 벽돌 한 장을 더 얹는 것은 아닐까. 더 나아가 성소수자가 발 딛고 있는 세계에서, 성소수자의 삶은 부모님의 걱정대로 정말 불행하기만 할까.
혈연 가족 안에서 내 편을 찾지 못한 성소수자들은 원가족 울타리 밖에서 ‘나답게 사는 삶’을 만들고자 저마다의 방식으로 조용히 투쟁한다. 법적 인정은 받지 못해도 결혼식을 올리거나, 외국에 가서 혼인신고를 하기도 한다. 「언니, 나랑 결혼할래요?」의 저자 김규진 씨는 동성결혼으로 회사에서 경조휴가를 받고, 동사무소에 혼인신고를 접수했다.(원래 접수도 안 되었지만, 이제 접수 이후 불수리 통지한다.)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사실혼 관계로 오래오래 동거하는 커플도 많다. 혹은 유성애적인 연인 관계가 아니더라도 친구들과 커뮤니티를 꾸리기도, 반려동물과 함께 살아가기도 한다. 이렇게 성소수자들은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에 포섭되지 않는 대안가족을 이미 각자의 사적인 삶에서 만들어가고 있다.
그러나 사적 영역에만 방치된 대안가족 구성원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절반 정도만 행복하고, 절반 정도 불행하다. 행정·교육·보건의료·주거·노동 등 삶을 영위하는 데 필수적인 영역들은 법 제도가 승인한 가족 관계만을 중심에 놓고 운영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가족 개념을 이성애적 결합에 국한해 협소하게 규정해 대안적인 가족 관계는 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 없다. 물론 국가인증마크가 붙어야만 당사자가 행복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더 넓은 가족 형태가 법 제도로 보장된다면, 우리는 본인에게 자연스럽고 행복을 주는 다양한 관계들을 더욱 적극적으로 탐색하고, 인생을 계획할 수 있다.
꼭 성소수자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혼인과 혈연을 넘어서는 가족 구성의 보장에 대해 사람들은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여성가족부가 2020년 성인 1천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69.7%가 “혼인, 혈연이 아니어도 주거와 생계를 공유한다면 가족이라 여길 수 있다”고 답했고, 70.5%가 “사실혼, 비혼 동거 등 법률혼 이외 혼인에 대한 차별 폐지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삶의 형태가 다양해지고 있는데, 법 제도가 너무 늦어 사회 분위기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이미 아시아 국가 중 대만, 네팔, 태국(예정)에서 동성혼이 법제화됐다. 일본 역시 총인구의 84%에 해당하는 지방자치단체에서 동성파트너십 제도가 마련되고, 여러 혼인평등 소송이 진행되고 있을 정도로 논의가 진전됐다.
한국에서도 구시대적인 이성애 중심의 가족 범위를 넘어서는 입법이 필요하다. 실제로 21대 국회에서는 동성혼 법제화(민법 개정안), 생활동반자법, 비혼출산법 등 ‘가족구성권 3법’이 발의되었다. 그러나 민주당의 동의 없이 법안은 통과되기 어렵다. 22대 국회에서도 마찬가지다. 모든 사회 진보에는 기존 체제를 수호하는 반대 여론이 있기 마련인데, 진보의 방향에 동의한다면 그 반대를 설득하고 넘어서는 것이 정치 집단의 몫이다. 민주당은 ‘사회적 합의’라는 비겁한 방패 뒤에 숨지 말고 적극적인 입법 과정을 통해 그 합의를 만드는 주체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나 시민은 국회만 쳐다보고 있을 수 없다. 각자 서 있는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그저 살아내야 한다. 삶은 투쟁이다. 본인을 긍정하고, 사랑을 나누고, 싸우고, 울고, 산책하고, 춤추고, 술 마시고, 노동하면서 서로 버팀목이 되어주는 것. 진짜 ‘가족’이라면 사회의 혐오에 굳이 벽돌 한 장 얹지 않고 따뜻한 포옹으로 삶을 있는 그대로 안아주는 것. 그리고 필요를 느낀다면 친구나 동료에게 존재를 숨기지 않고, 옆에 이런 삶도 똑같이 살아가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 일터와 삶터에서 원하는 것이 있다면 내 편을 하나씩 만들어 함께 당당히 요구하는 것. 우리가 뭉치면 못 할 것이 없다는 자신감을 가지는 것. 정치와 법 제도가 바위처럼 움직이지 않아도 냉소는 잠깐만 하고, 무력함과 체념을 넘어서는 더 큰 파도로 움직이는 것. 집채만 한 파도는 바위를 우리가 원하는 곳으로 움직일 것이다.
퀴어노동법률지원네트워크 (qqdong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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