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고양이를 돌보며

칼럼

*이 글에는 반려동물을 떠나보낸 이야기가 포함돼 있습니다. 같은 경험으로 아픔이 남아 있는 분들께서는 읽기를 잠시 멈추셔도 괜찮습니다.

▲ 빛별 퀴어동네 회원
▲ 빛별 퀴어동네 회원

보리가 아프다. 끈 놀이를 좋아하고, 집에서 제일 높은 책장에 올라가 앉아있기를 좋아하던 장난기와 애교 많은 고양이다. 보리를 처음 만난 건 2017년이다. 엊그제 같은데 벌써 시간이 많이도 흘렀다. 인간에게도 짧지 않은 시간이겠지만, 보리에게는 인간인 내가 체감하는 시간보다 더 긴 시간이 아니었을까. 그 사이 막내였던 보리는 맏이가 됐다. 장난기 많던 모습보다 조용하고 담담해진 모습이 더 익숙해진 지도 꽤 된 것 같다.

수술을 받고 퇴원한 보리는 많이 지쳤는지 울지도 않고 누워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밥도 물도 잘 안 먹고 습식사료만 조금 먹고 있다. 인간이 없어도 잘 지내던 친구들이지만, 적어도 당분간은 인간이 곁을 지켜야만 한다. 애인은 재택근무를 신청했고, 조정할 수 없는 일정이 있는 날에는 내가 연차와 재택근무를 하기로 했다. 일을 하면서도 보리를 돌볼 시간을 낼 수 있는 상황임에 그저 감사할 뿐이다.

보리는 바람과 함께 컸다. 보리와 바람은 모두 애인과 함께 살던 고양이들이다. 나는 애인과 함께 지내며 처음으로 반려동물과 함께하는 생활을 시작했다. 사실 나는 동물들을 아주 무서워하는 편이었다. 길에서 목줄을 하고 산책하는 작은 강아지만 봐도 거리를 두고 갈 정도였다. 애인과 애인의 고양이들과 함께 살기 위해 고양이 카페를 가고 친해지는 방법을 배워갔다. 그렇게 나도 그들의 가족으로 스며들었다.

사람을 좋아했던 보리와 달리 바람은 처음부터 내게 곁을 내어주지는 않았다. 바람이 먼저 내 곁으로 다가와준 것은 시간이 꽤 지난 뒤였다. 바람은 놀라울 만큼 부드러운 털을 가졌다. 바람을 쓰다듬을 때의 느낌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런데 바람은 너무 갑작스럽게 떠났다.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던 질환이 급속도로 악화했다. 예민하고 숨기 좋아하던 바람이었기에 나는 더 빨리 눈치채지 못했다. 어느날 갑자기 애인은 바람을 병원에 데리고 가봐야겠다고 서둘러 집을 나갔다. 나는 겉으로 보기에 다른 걸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바람이 태어날 때부터 곁에 있었던 애인은 이상을 감지했다. 그렇지만 끝내 바람은 그날 이후 제 발로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바람이 떠난 뒤에 보리의 성격이 급격히 달라졌다. 바람이 떠나서 보리가 우울증에 걸린 걸까 걱정이 됐다. 늘 싫다는 바람 옆을 비집고 함께 앉으려 했던 보리였기에 혼자 두기가 걱정됐다. 그렇게 우리는 구조된 길냥이를 입양하기로 결정했다. 고양이 합사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길에서 구조된 아기고양이는 전염성 피부병이 있어 격리가 필요했다. 에너지 넘치는 아기고양이 격리는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 이 정도면 나는 게 아닐까 할 정도로 계속해서 펜스를 넘으려 안간힘을 썼다. 그런 아기고양이들을 막내였던 보리는 맏이가 돼 바라봤다. 신기해하는 것 같기도 당황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보리는 바람과 있을 때와는 다른 모습으로 동생들 곁에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가족이 됐다.

보리가 안 좋다는 얘기를 듣고 곧바로 짐을 챙겨서 애인 집으로 향했다. 사실 몇 달 전부터 나는 애인과 따로 지냈다. 원가족에게 커밍아웃을 하지 못한 나는 애인과 함께 산다는 사실을 숨기고 지내왔다. 거짓말로 둘러댄 거취를 들키지 않으려고 여러 방법을 썼다. 거짓말은 나에게 불안의 원천이었다. 그러다가 원가족이 의심하기 어려운 집을 운 좋게 구하게 돼 그곳으로 거취를 옮겼다. 하지만 그곳에서 나는 외로움을 느꼈던 것 같다. 보리가 있는 (애인이 있는) 우리 집으로 돌아오니 그걸 깨달았다. 아픈 보리와, 아픈 보리를 돌보면서 아파하는 애인을 돌보기 위해 집으로 돌아가는 발길을 재촉하면서 귀가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가서 자야지, 가서 쉬어야지가 아니라 그저 ‘어서 가야지’라는 감각. 그것이 콘크리트로 이뤄진 집이 아닌 가족이라는 감각이구나 새삼 깨닫는다.

너무 갑작스럽게 떠난 바람과 달리 보리는 우리 곁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주려나 보다. 지치고 힘든 기색이 역력하지만 나를 빤히 바라봐주는 보리의 눈을 보면 ‘괜찮아’라고 나를 위로하는 것 같다. 인간이 보고 싶은대로 보고, 듣고 싶은대로 듣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 보리가 우리에게 말을 건네고 있다고 생각한다.

고양이털 알러지가 있어 하루에도 몇 번씩 알러지 약을 먹는 내 애인과, 인간 외의 모든 살아 움직이는 생물을 무서워하던 나와, 자기 영역이 중요한 세 마리의 고양이와, 그리고 지금도 우리 곁에 있는 것만 같은 바람과, 나는 만나본 적 없는 바람의 엄마 리카와. 어쩌면 함께 하기에는 너무도 어려울 우리는 서로를 내어주고 물들여가며 함께한다. 소위 말하는 정상가족은 아닐지 몰라도. 불온전한 우리는 함께하기에 진정으로 온전함을 느끼며 서로를 돌본다. 가족관계증명서로는 증명되지 않을 퀴어한 우리 가족이 살아가는 모습이다.

퀴어노동법률지원네트워크 (qqdong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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