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만나다

칼럼

▲ 한울 퀴어동네 운영위원

차별금지법이 제정되고 모든 차별이 금지됐으며 많은 소수자들의 삶이 조금 나아진 가까운 미래다. 산전수전 다 겪은 120세 주인공 여성이 ‘그녀’의 팬클럽 미팅에 갔다가 혐오세력이 일으킨 폭탄 테러에 휩쓸려 큰 부상을 당하고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지팡이를 잃어버리고 말귀를 못 알아듣는 간병로봇 때문에 힘들어하면서도, 주인공은 영상에 달린 4억개의 댓글 중에 테러범의 단서를 찾아내 결국 테러범의 정체를 밝혀낸다. 그리고 긴 기다림 끝에 3년 만에 다시 열린 ‘그녀’의 팬클럽 미팅 현장, ‘그녀’는 보안정책을 위해 딥페이크 기술을 적용해 만들어 낸 가상의 모습, 개개인이 상상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누군가는 괴물의 형상을 보고, 누군가는 둥근 얼굴의 부드러운 여성을 본다.

정보라 작가의 단편소설, <그녀를 만나다>의 줄거리다. 소설, 특히 SF 소설을 좋아한다. 정보라 작가도 좋아하는 작가인데, 책 표지가 마음에 들어서 읽기 시작했다. 분홍색, 하늘색, 흰색 줄에 눈 감고 있는 여자가 그려진 표지였다. ‘트랜스 플래그와 비슷하네’라고 생각은 했지만, 퀴어가 등장하는 소설인 줄은 몰랐다. 단편 소설집은 늘 제목이 끌리는 순서로 읽곤 하는데, ‘그녀를 만나다’라는 제목이 끌려 먼저 읽기 시작했고, 눈물이 났다. ‘그녀’는 변희수였다.

2020년 1월, 한 군인이 트랜스젠더라는 이유로 강제전역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당사자인 변희수 하사는 이에 불복해 전역 결정을 다시 심사해 달라고 육군에 인사소청을 제기한다고 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고, 그녀를 마음 속으로 응원했다. 비슷한 시기 한 여대에서 트랜스젠더의 입학을 반대하는 대자보가 붙어 논란이 됐고, 당사자는 결국 입학을 포기했다. 오히려 다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그녀의 꿈을 응원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2021년 2월, 변희수 하사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 트랜스젠더 군인 변희수의 복직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무지개 행동에서는 지하철 2호선에서 성소수자 관련 책을 함께 읽는 추모 행동을 했다. 합정역에서 <퀴어이론 산책하기>라는 책을 들고 지하철에 탔다. 자리에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누군가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어쩌면 내가 내는 소리였을지도. 한 글자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절대 잊지 않는 건 그 순간순간의 감정이었다. 기억도 논리도 이성도 인간의 모든 지적 활동이 다 사라져도 마지막까지 남는 것이 감정이다. 그 분노와 공포와 충격과 슬픔과 원한과 거대한 상실감만은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를 만나다> 중

올해 첫눈이 온다. ‘겨울이다’는 느낌과 동시에 그때 들고 있었던 책의 무게, 손 시림, 지하철을 기다리던 조마조마함,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감, 흐느낌, 슬픔, 분노, 무기력함, 기어이 살아내겠다는 다짐 같은 것들이 뒤섞인 채 마구잡이로 떠오른다. 당시 퀴어동네 주민들과 함께 책모임을 진행하며 변희수 하사의 일에 분노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기의 맥락은 잊어버렸지만 그때의 감정은 생생하다. 2024년 11월25일, 도널드 트럼프는 미군 내에서 모든 트랜스젠더 군인을 추방하는 내용의 행정명령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같은해 11월16일 한국산업인력공단 이사장은 “ㄷ여대 학생들은 채용에서 걸러 내고 싶다”고 했다. 여전히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와 배제가 존재하고, 이러한 차별은 언제나 그렇듯 누군가를 죽음으로 몰고 갈 정도로 위협적이다. “우리 모두 서로 힘내도록 합니다. 죽지 맙시다. 물론 저조차도 이게 매우 어려운 말이라는 것을 알긴 하지만, 죽기에는 우리 둘 다 너무 어리잖아요? 꼭 살아남아서 이 사회가 바뀌는 것을 같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꼭 그렇게 되도록 합시다.” (변희수 하사와 숙대 합격생이 서로에게 쓴 손편지 전문, 한겨레, 2020. 3. 17.)

그녀를 만나고 싶다. 눈을 감고 120살이 된 날 상상한다. 잊지 않고 아등바등 살아내 세상이 바뀌는 걸 꼭 보고야 말겠다는 다짐을 한다.

퀴어노동법률지원네트워크 (qqdong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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