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릴 때 다니던 큰 교회는 매년 여름이 되면 수천명의 아이들을 모아놓고 3박4일 수련회를 했다. 90년대 초반 그해의 주제는 바로 사탄의 음악이었다. 전국에서 모인 초중학생 수천명을 앞에 놓고 강연하던 그 목사의 요지는 이랬다. 사탄이 대중문화에 속속들이 침투해 청소년의 정신을 망가뜨리고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 사탄이 어디까지 와있는지 알려주겠다면서 대형 스피커로 노래를 차례로 틀어줬다. 한 곡 한 곡 소개될 때마다 그 자리에 모인 학생들은 경악하며 비명을 질렀다. 매일 TV에서 듣고 따라 부르던 마가렛트 과자 광고 음악이 사탄의 음악이라고? 비틀스의 ‘옐로우 서브마린’이 마약을 상징하는 은어였다니! 메탈 음악은 말할 것도 없고 마이클잭슨·조지윈스턴·퀸 등 웬만한 외국 노래 중 사탄을 찬양하는 음악이 아닌 게 없었다. 사실 음악에만 국한한 것도 아니었다. 외계인 영화를 만든 스티븐 스필버그도 사타니즘이고, 스타워즈를 만든 조지 루커스도 사타니즘이고, 디즈니 애니메이션도 마찬가지였다. 청소년에게 인기 있을수록 더욱 강한 사탄인 것 같았다.
집에 돌아와서는 추천 도서 <사탄은 마침내 대중음악을 택했습니다>를 탐독했다. 그 후로 더 이상 음악을 편하게 들을 수 없게 됐다. 당시 얼굴이 뽀얗던 시절의 신해철에 빠져 있었는데, 사탄의 상징이라고 했던 피스마크 목걸이를 그의 앨범 표지에서 발견하고는 울면서 테이프를 휴지통에 처박았다. 독서실에서 라디오를 듣다 영어로 된 노래가 나오면 무서워서 껐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당시 최고 아이돌이었지만 앨범을 거꾸로 돌리면 “피가 고파”가 나온다는 노래를 듣기에는 간이 작았다. 그래도 순진했던 시절이 오래가지는 않아 교회와는 곧 멀어졌고 대학에 들어가서 뒤늦게 록 음악에 빠졌다. 이 멋진 음악들을 몰랐던 사춘기가 진심으로 한스러웠다. 청소년기에 록 음악을 계속 들었다면 지금보다 더 반항적이고 멋진 사람이 됐을 것만 같았다. 21세기 들어서도 개신교 혐오세력은 레이디 가가 콘서트 반대 기도회를 열어 물의를 일으키는 등 한동안 대중문화와 싸웠지만 지금은 시들해진 것 같다.
대신 ‘가정을 무너뜨리고 나라를 무너뜨리는’ 공포의 대상이 동성애와 차별금지법으로 옮겨갔다. 동성애와 차별금지법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는 주장에는 근거가 없기에 ‘사탄에 물든 대중음악’처럼 거짓말로 쌓은 공포를 주입한다. 개신교 혐오론자들은 차별금지법이 ‘동성애 독재법’이라고 주장한다. 차별금지법이 입법되면 동성애가 독재하게 되고, 학교에서는 동성 간 성행위를 가르쳐야 하고, 에이즈 치료 때문에 국가 의료재정이 파탄 나고, 동성애를 반대하는 교회와 목사는 처벌받게 된다. 90년대는 대중문화에 대한 음모론 수준이었지만 지금은 민주주의를 방해하고 구체적인 존재들을 위협한다는 점에서 해악이 더 커졌다. 차별금지법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말도 안 되는 주장인 것을 알 수 있겠지만 그들에게는 다양성이 존중되고 평등한 세상은 필히 지금보다 무서운 세상이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공포를 느껴야 하는 건, 매년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에 추모해야 할 이들이 계속해서 늘어난다는 것이다. 평생을 반려로 살아도 법률혼이 허락되지 않아 반려인의 장례도 치르지 못하는 죽음이 버젓이 있다는 것이다. 인종·성정체성·성적지향 등으로 직장에서 밀려나 삶의 자리를 찾지 못하는 것, 이동 장애인이 지하철을 타다가 떨어져 죽는 것, 남녀로 나뉜 화장실을 가지 못하거나 휠체어로 이동이 힘들어서 집에 갇힌 사람들의 현실이 차별금지법을 만들지 못한 기간인 18년째 그대로라는 것. 이런 것들이 진정한 공포다. 평등으로 세상은 망하지 않는다. 차별을 금지하면 차별이 줄어들고 동성혼을 법제화하면 동성 커플이 결혼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상식을 가진 사람만이 민주시민이 될 자격이 있다.
퀴어노동법률지원네트워크 (qqdongne@gmail.com)
댓글
타인을 비방하거나 혐오가 담긴 글은 예고 없이 삭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