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거 따지는 순간, 우리 비즈니스 못해.”
민서(가명)씨는 유럽산 자동차 회사인 ㄱ자동차 서비스센터에서 전화 상담사로 일하는 하청노동자다. 어느 날 회사 이사와의 면담에서 위와 같은 말을 들었다. 이사가 말하는 ‘그거’란 몇 달 전에 민서씨가 겪은 성추행을 말한다. 원청과 하는 회식자리에서 원청 직원 하나가 내내 추잡스럽게 굴다가 회식이 끝나고 나서도 민서씨를 계속 쫓아왔고 “호텔로 가자”며 거절하는 민서씨를 완력으로 이끌었다. 민서씨는 공포스러운 순간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와 회사에 사실을 알렸다.
이 일로 원청 ㄱ자동차 회사의 임원이 직접 민서씨를 찾아왔다. 민서씨는 만나고 싶지 않았지만 ‘가벼운’ 식사 자리니까 참석해 달라는 상사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원청 임원은 추행 직원을 회사 내규로 확실하게 징계할 테니 경찰 신고만큼은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을 했다. 동석했던 상사는 “덕분에 맛있는 거 먹고 하니 좋다”며 원청 임원의 기분을 맞췄다. 민서씨는 그날 급체를 했고 집에 와 먹은 것을 전부 토했다. 그렇지만 확실하게 징계하겠다던 원청 임원의 약속만큼은 굳게 믿었다. 하청 상담사들의 카카오톡 대화방에서는 “내부감사팀이 직접 조사해서 징계한대” “외국계 큰 기업이라 역시 다르네”라는 대화가 오고 갔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도 원청 직원이 징계받았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다른 부서로 이동하라는 인사발령이 민서씨에게 내려졌다. 지금 있는 ㄱ자동차 부서보다 급여도 낮고 근무환경이 열악한 부서였다. 담당 이사는 면담에서 원청 ㄱ자동차가 민서씨를 콕 집어서 “업무에서 빼라”라고 했다는 것을 실토했다. 민서씨가 “원청에 부당하다고 얘기해야 하는 것 아니냐”라고 했더니 하청 이사에게서 돌아온 것은 “그거 따지는 순간, 비즈니스 망가진다” “왜 그걸 회사에서 따져줘야 하냐”는 말이었다.
원청과 하청은 콜센터 상담사들에게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성폭력을 못 본 척하는 데 공모하며 끈끈한 비즈니스를 이어갔다. 원청 임원은 딸이 둘이나 있는 자기 직원이 ‘고작’ 하청 직원 때문에, 한 번의 ‘실수’로 경력을 망치는 게 안타까웠을 것이다. 하청 이사는 ‘이런 일’로 원청과의 ‘비즈니스’를 망치게 될까 봐 억울해했다. 대화 중에 “왜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하지?”라고 말한 사람은 놀랍게도 민서씨가 아니라 하청 이사였다. 민서씨는 결국 다른 부서로 쫓겨가야 했다.
원청과 하청은 민서씨를 자리에서 없애면 성추행이 없던 일이 될 거라 여겼던 것 같다. 그러나 상담사가 자신들이 정해놓은 매뉴얼 밖에서도 목소리를 낼 줄 알고, 부당함에 화를 낼 줄 아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몰랐던 것 같다. 민서씨는 노동위원회에 부당함을 호소했고, 심문회의에 나온 하청 이사는 불쾌해 죽겠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하지만 민서씨를 시야 밖으로 밀어낸 것은 원청과 하청만이 아니다.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남녀고용평등법)은 직장내 성희롱이 발생하면 회사가 직접 사건을 조사하고 징계 등의 조치를 할 의무를 정하고 있지만, 하청 직원에게 행한 성희롱에 대해서는 아무런 법적 의무를 지우지 않는다. 직장갑질119는 올해 여성의날 기자회견에서 이 문제를 ‘직장내 성희롱 사각지대’라고 지적했다. 사각지대란 엄연히 존재하지만 시야에서 사라진 공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폭력이 있지만 우리 법이 애써 보지 않는 공간을 말한다. 민서씨와 같은 하청 노동자들이 수시로 겪는 일이지만 ‘직장내 성희롱’이라는 언어를, 수단을 주고 있지 않은 게 아직 우리 법의 수준이다.
민서씨는 결국 원래의 부서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러나 민서씨는 사건을 개인의 억울함으로만 남겨두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가만히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으니 앞으로 다른 피해자들이 또 생기지 않게 목소리를 내고 싶다고, 기회가 되면 불러달라고 말했다.
약자의 말하기는 종종 무모해 보인다. 당장 세상을 바꾸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말하기도 그냥 사라지지 않고 어떻게든 어디론가 가서 싹을 틔운다. 지금, 법이 애써 목소리를 주지 않는 곳에서도 말하기를 멈추지 않고 있는 모든 사람을 응원한다. 제도의 변화는 늘 그런 무모한 목소리에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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