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같이 수영 잘하는 할머니가 되면 좋겠어

칼럼

▲ 빛별 퀴어동네 회원(퀴어노동법률지원네트워크)

요즘 수영을 다니고 있다. 나중에 나이가 들어도 수영 잘하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는 로망이 생겼기 때문이다. 같은 레일에서 함께 배우는 분들 중에는 부부가 꽤 많다. 그들을 볼 때 나 역시 애인과 함께 수영을 배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 생각 없이 물에 둥둥 떠 있는 이 기분을 같이 나누고, 잘 안 되는 자세를 서로 봐주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와 애인이 데이트를 할 때 선택지로 고려되지 못하는 장소들이 있다. 수영장은 그 대표적인 예다. 찜질방이나 스파, 워터파크와 ‘빠지’도 마찬가지다. 이런 공간들의 공통점은 탈의실과 샤워실을 거쳐야만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이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성별이분법적인 공간을 통과해야만 입장할 수 있는 곳들이다. ‘통과’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단순히 지나쳐 간다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어떤 기준이나 조건을 충족해 허가를 받는다는 뜻이다. 시스젠더인 나에게는 전자의 의미로 쉽게 통과하는 공간이, 트랜스젠더인 내 애인에게는 후자의 의미가 된다.

10년 가까이 연애를 하면서 내가 애인과 함께 수영장에 간 횟수는 한 손에 꼽는다. 탈의실과 샤워실을 거치지 않아도 되는 수영장. 결국 호텔 수영장뿐이었다. 지금 내가 다니는 체육센터 수영장의 일일 이용권은 비회원 기준 1만원 정도라고 한다. 하지만 호텔 수영장을 이용하려면 비수기라도 20만원 가까운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그나마 수영장은 비싼 비용을 내면 잠시 기분이라도 낼 수 있지만, 찜질방이나 워터파크는 그런 선택지조차 없다. 물론 내 애인은 찜질방이나 워터파크를 특별히 좋아할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선호하지 않아 가지 않는 것과, 애초에 선택지에서 배제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얼마 전 한국다양성연구소와 수오서재가 함께 진행한 <젠더의 경계를 넘는 아이들> 북토크에 다녀왔다. 책이 다루는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는 스포츠였다. 패널로 참여한 루인은 “트랜스는 4년에 한 번 등장한다. 올림픽 때 말이다”라는 농담을 했다. 웃기지만 또한 서글픈 말이다.

트랜스젠더 선수들은 늘 ‘논란’의 형태로만 호출된다. 대표적으로 2022년 전미대학체육협회(NCAA) 선수권 대회 500야드 자유형에서 우승한 리아 토마스가 있다. 리아는 당시 규정에 따른 호르몬 기준을 충족해 여성 경기에 출전했지만, 사람들은 그 사실보다 트랜스젠더라는 점에만 집중했다. 리아가 우승하지 못한 경기들에서는 시스젠더 여성 선수들이 리아보다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었다는 사실은 언급되지 않는다. 성기 수술을 하지 않았다는 자극적인 정보는 대서특필 되면서도, 성별정정수술에 필요한 막대한 비용과 긴 회복 기간, 신체적 위험에 대해서는 좀처럼 이야기되지 않는다. 2025년 트럼프 행정부가 트랜스 여성의 여성 스포츠 참여를 제한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한 후 리아의 소속 대학인 펜실베니아 대학은 리아의 기록을 삭제했고 사과했다.

메달이나 기록만의 문제가 아니다. 일상에서도 마찬가지다. 누가 어떤 공간에 들어갈 수 있는지 판단하는 보이지 않는 문지기들이 있다. 성별이분법적인 공간은 그것이 당연하고 안전한 질서인 것처럼 존재하며, 그에 맞지 않는 존재를 불온하다고 낙인찍는다.

잘못된 것은 사람이 아니라 공간이다. 시스젠더라 해서 남·여로만 구분된 탈의실이나 샤워실이 그다지 편안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모두가 각자의 몸을 안전하고 편안하게 돌볼 수 있는 개별 샤워룸과 개별 탈의실이 있다면 어떨까? 무더위에 지칠 때 애인과 함께 워터파크도 가고, 날이 추워지면 찜질방에서 등을 지지며 함께 식혜를 나눠 마실 수도 있겠지. 호텔 수영장이 아니라 체육센터 수영장에서 함께 수영을 배우면서, 나중에는 수영 잘하는 할머니들이 되면 참 좋겠다. 이 모든 게 상상이 아니라 선택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실제로 그런 선택을 하지 않더라도, 선택하지 않는 선택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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