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HIV/AIDS인권행동 알’이 주최한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HIV) 감염인 노동실태조사 결과발표회에 토론자로 참석했다. HIV 감염인의 노동실태를 집중적으로 조사한 첫 보고서였다. 소수자 내에서도 소수자인 감염인 노동자에게 어떤 말을 건넬 수 있을까. 그 고민의 출발점은 보고서가 담아낸 현실이었다.
보고서에서는 HIV 감염인의 노동 현실에 대해 세 가지 문제점을 꼽는다. 첫째, 감염인이 확진 초기에 스스로 직장과 꿈을 포기한다. 법적으로 취업이 제한된 직종은 군인·비행기 조종사·유흥업소 종사자 단 세 가지뿐이지만, 현실에서는 공무원·보건의료·요식업 등 일할 수 있는 분야를 스스로 걸어 잠근다. 에이즈에 대한 사회적 혐오가 내적 낙인이 되어 법이 금지하기 전에 먼저 문을 닫는 것이다. 둘째, 직장 내 감염 사실 노출에 대한 극심한 두려움이다. 후천성면역결핍증 예방법(에이즈예방법) 8조의2와 7조는 검진 결과 요구를 금지하고 감염인 정보의 비밀보장을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사업장에서 건강검진 결과를 일괄 수집하는 것이 관행이고, 감염 사실 유포로 인한 해고 등 불이익 처우에 대한 직접적 제재 규정은 존재하지 않아 한계가 있다. 셋째, 군 면제·의가사제대 감염인 노동자가 구직 과정에서 병역 정보를 통해 감염 사실을 간접 노출당하는 문제다. 채용절차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채용절차법)상 표준 이력서에 병역 사항이 없는데도 많은 기업이 수집하고 있다. 이는 감염인에게 또 다른 차별의 통로가 된다.
근본적 해결책은 포괄적 차별금지법이지만 2007년 첫 발의 이후 20년이 지난 지금도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에이즈예방법도 마찬가지다. 감염인의 비밀보장과 차별금지를 규정하고 있으나 고용에서의 차별을 직접 금지하지 않아, 채용 탈락·해고·괴롭힘을 당했을 때 실질적 구제 수단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전파매개행위죄처럼 감염인을 범죄화하는 조항을 품고 있고, 헌법소원마저 합헌 판결이 나는 등 갈 길이 요원하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당장 나아갈 수 있는 대안은 무엇일까.
근로기준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직장내 괴롭힘 금지는 법 개정 없이도 지금 당장 제시할 수 있는 대안이다. 현행 고용노동부 가이드라인은 괴롭힘의 유형과 예시를 세분화해 제시하고 있는데, 여기에 HIV 감염인에 대한 차별적 괴롭힘을 명시적으로 포함시키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 수 있다. 노동부가 2024년 3월 배포한 직장내 괴롭힘 예방·대응 매뉴얼에는 처음으로 ‘게이’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옷차림을 지적하는 발언의 예시(“옷이 게이 같다”)로 들어간 것이었지만, 성소수자가 직접적인 예시로 등장한 것 자체만으로 그러한 표현이 모욕적이라는 예시임과 동시에 성소수자의 존재를 일터 안에서 가시화하는 효과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모범 단체협약안에 성소수자를 포함해 화제가 됐던 민주노총 사례처럼 단체협약에 HIV 감염인을 포함해 더욱 넓게 보호하는 협약을 체결하거나, 표준취업규칙에 차별적 괴롭힘 금지 조항을 반영하고, 직장내 괴롭힘 예방교육 내용에 HIV 감염인에 대한 차별 사례를 포함시키는 것도 같은 방향의 변화다.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장애인차별금지법)은 현재 진행 중인 HIV 감염인들의 법적 대안이다. 최근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에서는 HIV 감염인이 장애인에 해당한다며 장애등록 반려처분에 대한 행정소송을 진행 중이다. HIV 감염은 면역기능의 손상을 수반하는 만성질환으로 장애인차별금지법상 장애에 해당할 수 있는데도 이를 인정하지 않아 제도 밖에 방치된 감염인의 인권 회복을 위해 제기됐다. 만일 소송과 입법 과정을 통해 감염인이 장애인복지법 시행령상 장해 유형으로 인정된다면, 감염인 노동자는 장애인차별금지법에 따라 채용 거부, 해고, 승진 배제, 직장내 괴롭힘 등 고용 전 과정에서의 차별에 대해 법적 구제를 받을 수 있게 된다.
차별금지법은 여전히 멀리 있다. 그러나 법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감염인 노동자들은 오늘도 출근하고 일터에서 버텨내고 있다. 거창한 것이 아니어도 된다. 가이드라인의 예시 하나, 소송의 판결 하나, 단체협약의 조항 하나, 지금 우리 손에 있는 것들을 하나씩 쌓아가는 것이 HIV 감염인 노동자와 함께 나아갈 수 있는 우리의 출발점이다.
퀴어노동법률지원네트워크(qqdong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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