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당장, 차별금지법

칼럼

▲ ○○ 퀴어동네 운영위원

“선생님, 법으로 인정되든 인정되지 않든 선생님의 경험, 감정은 다 진짜예요. 그게 거짓이 되는 건 아니에요. 법은 진실을 판단하는 게 아니라 남아 있는 증거에 따라 누구 말이 더 그럴듯한지를 판단하는 거예요. 그리고 법은 보수적이잖아요. 그러니 결과가 어떻든 스스로를 탓하지는 마세요.”

누군가의 사건을 대리할 때면 늘 하는 말이다. 적어도 ‘나는 당신의 말을 믿습니다’라는 믿음을 건네기 위함이고, 앞으로 진행될 절차에서 조금이라도 상처를 덜 받았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물론 말뿐이다. 법이 왜 이따위냐고, 억울하다고, 이해가 안 된다고 아이처럼 엉엉 우는 사람 앞에선 아무런 힘이 없다. ‘그러게나 말이에요.’ ‘저도 이해가 안 돼요.’ ‘법을 함께 바꿔요.’ 여러 문장이 떠오르지만 결국 입 밖으로는 “죄송합니다”라는 말만 나온다.

“그러니깐 제가 원하는 건 걔가 제 삶에서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거예요. 그거면 돼요.”

얼마 전 예전 애인의 스토킹으로 변호사 상담을 받았다. 변호사님은 친절했고, 전문적이었다. ‘너무 안타깝지만’ 상대방이 어떤 행동을 못 하게 하거나 어떤 장소에 못 오게 할 수는 없고, 어떤 행동을 하거나 어떤 장소에 나타났을 때 조치할 수는 있다고 했다.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접근금지 가처분 신청을 하려면 피해자의 개인정보, 그러니깐 주소와 핸드폰 번호를 가해자에게 알려주어야 한다고 했다. ‘제도적 한계지만’ 아웃팅을 하겠다고 미리 이야기하면 협박죄가 성립할 여지가 있지만, 이미 아웃팅을 해버렸다면 아무런 법적 조치를 할 수 없다고 했다. 웃음이었는지, 한숨이었는지 모르겠다. 입 밖으로 큰 숨이 나왔다. ‘아 맞다. 법은 이런 거였지.’

법이 진실과 무관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법의 판단이 전부가 아니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억울했다. 무력했다. 내가 겪은 일들을 부정당하는 기분이었고, 법에서조차 괜찮다는데 나 혼자만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 같았다. 내가 사실을 왜곡하고 잘못된 감정을 느끼는 것 같았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아이처럼 울었다.

법이 완벽하지 않고, 완벽할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노동법도 마찬가지다. 아직도 병가제도가 없는 점, 기간제 노동자도 매달 개근해야 하루의 휴가가 생긴다는 점 등 현행 노동법에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제도들이 있다. 아픈데 개인 연차를 쓰는 건 너무 부당기하다는 말에, 기간제 노동자는 가족여행도 못 가는 게 말이 되냐는 질문에 나 역시도 부당하고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 부당함과 억울함은 누가 뭐래도 정당하다.

게다가 법은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조금 더 평등한 방향으로, 공정한 방향으로 흘러간다고 믿는다. 차별금지법 제정연대는 2007년부터 차별금지법의 제정을 위한 투쟁을 해왔고, 근로기준법상 병가제도 도입에 대한 이야기도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다. 언젠가 차별금지법은 제정될 것이고, 병가제도도 만들어질 것이며, 노동자의 휴가는 폭넓게 보장될 것이다. 중요한 건 ‘언제’다. 그리고 ‘그때’가 올 때까지 부재에 대한 책임을 누가 짊어지고 있느냐다. 법을 제정할 권한이 있는 자들은 이 부재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다. 책임은 오롯이 법의 보호가 필요한 약자들에게 돌아간다.

아마 본인이 직접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 아닌 이상 법의 부재에 대해서 인지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다 막상 도움이 필요한 상황을 맞닥뜨릴 때, 정말 간절하게 필요로 할 때, 부재를 체감하게 되는 것이다. 아웃팅을 규제할 법이 없다는 변호사의 답변을 들었을 때, 타인의 자유를 무한히 제한할 순 없지 않냐는 법률 답변을 들었을 때, 실감났다. 차별금지법의 부재가. 처음엔 그 부재가 믿기지 않는다. 그러다가 부재가 확실해지면, 본인의 감각과 경험을 의심하게 된다. 마치 부당한 요구를 하는 것 같고, 스스로 거짓말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 과정은 우리를 천천히 으스러지게 하고, 병들게 하고, 결국은 침묵하게 한다. 너무 너무 화가 난다. 더 시끄럽게 떠들고 싶다. 이 부당함이 정당하게 들릴 때까지. 그래서 지금 당장, 법이 바뀔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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