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석열 비상계엄으로 우리는 역사책에서만 봤던 계엄이 실제로 벌어질 수 있으며, 그것이 초래할 끔찍한 가능성을 상상하고 대비하게 됐다. 국회 앞으로 달려간 시민의 힘으로 계엄을 해제했고, 우리 삶을 핍박했던 윤석열 정권을 끌어내리고자 수없이 많은 거리의 행렬로 탄핵안 가결까지 이뤄냈다. 이제 우리는 고민해야 한다. 탄핵이 완수된 윤석열 이후의 한국 사회는 어떤 사회가 돼야 하는지.
윤석열을 끝장내기 위해 숨 가쁘게 달려야 할 현실적인 과제가 남은 상황에서, 그 이후의 사회까지 지금 당장 고민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 수 있다. 최종적인 파면 결정을 유도하기 위해 시민들은 또다시 거리로 나가 헌법재판소를 압박해야 하고, 위헌적인 계엄 시도에 대해 윤석열과 계엄 잔당의 죄목을 낱낱이 밝혀 체포 및 처벌을 완수해야 한다. 그것에만 집중해도 벅찬 일이라고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맞는 이야기다. 현 제도는 여러 장벽을 촘촘하게 세워놓아서 대통령이 시민들의 삶을 파탄에 빠뜨려도, 그를 끌어내리려면 어마어마한 노력이 필요한 구조다. 헌법재판관 몇 명이 필요하고, 누구에게 그것을 임명할 권한이 있는지, 탄핵 요건에 부합하기 위해 ‘법적’으로, ‘절차적’으로 완비할 것은 무엇인지 거리에 나갔던 벅찬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차분한 척 챙겨야 한다. 다만 진공 속의 법과 제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같은 구절의 법이어도, 사회 분위기나 힘의 세력 관계, 상황에 따라 적용과 판단이 달라지기 마련이다. 더 많은 시민이 모여 헌법재판소의 올바른 결정을 요구해야 하는 이유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을 거리로 모아내기 위해서라도, 광장은 탄핵 이후의 사회에 대한 다양한 목소리가 분출되는 열린 공간이어야 한다. 윤석열이 없어진다고 해서, 윤석열 정권이 탄압했던 평범한 노동자와 소수자의 삶이 저절로 나아지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극단으로 비정상적인 특정 인물을 제거한다고 해서, 차별과 착취를 만드는 자본주의와 한국 사회의 병폐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압도적으로 많은 수의 시민이 거리로 나올 수 있던 것은 윤석열이 계엄을 시도했다는 예외적인 비상사태를 해소하려는 공감대 때문이지, 윤석열 이후 우리의 삶이 직접 나아지리라는 낙관과 기대감 때문은 아니라는 판단을 감히 해 본다. 국회에서 탄핵이 통과돼 일단 1차 목표가 달성된 마당에, 계엄에 대한 충격만으로 헌재 판결 시까지 그 큰 규모의 집회를 유지할 수 있을까. ‘아직 그런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다’라며 탄핵 외의 의제를 배제하거나, 사회 변화를 촉구하는 시민들의 뜨거운 열망을 특정 정당과 정치인에 수렴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윤석열이 사라진 한국에서 평범한 이들의 삶이 어떻게 더 나아질 수 있을지 원하는 바를 정치적으로 이야기하는 속 시원한 공간, 내가 나답게 존재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이 돼야 오히려 더 압도적인 힘으로 탄핵까지 갈 수 있을 것이다.
윤석열 정권에서 얼마나 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팍팍해졌나. 불경기에 물가는 폭등하고 주머니는 얇아지는데, 이미 돈 많은 부자의 주머니만 더 두꺼워졌다. 스스로의 삶을 개선하고자 투쟁하는 노조를 깔아뭉개고, 공안 탄압을 자행했다. 아무런 죄 없이 죽음을 맞은 이태원의 청춘들, 채 상병을 기억한다.
평일과 주말에 이어진 윤석열 탄핵 집회에서는 아주 많은 여성, 소수자들의 깃발과 참여를 확인할 수 있었다. 비록 지금 당장 직면한 의제인 탄핵을 계기로 여기에 모였지만, 태어나서 처음 보는 숫자의 사람이 모인 집회 공간에서 퀴어 동지들은 무지개 깃발 아래 모여 존재를 가시화했다. ‘모두의 결혼’ 캠페인 참여를 독려하는 등 우리의 이야기를 외치는 모습을 보며 탄핵 이후 더 나은 사회에 대한 낙관적인 감정을 잠시나마 느꼈다. 탄핵 시국에 평범한 노동자와 소수자의 삶에 맞닿아 있는 의제들이 분출되기를, 그래서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기대로 거리에 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퀴어노동법률지원네트워크 (qqdong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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