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7일은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이었다. 세계보건기구가 1990년 5월17일 국제질병분류를 개정하며 “동성애”를 정신장애 부문에서 삭제하고 ‘성적 지향만으로는 장애로 간주되지 않는다’고 명시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한국에서는 매년 인권시민사회단체가 공동행동단을 꾸려 성소수자 차별과 혐오의 문제를 알리고 변화를 촉구하는 집회와 캠페인 등을 한다. 퀴어동네도 당일 저녁 집회가 열린 보신각에 모였다.
올해는 △성소수자의 존재를 법과 제도에 반영할 것(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동성결혼 법제화·생활동반자법 제정·성별의 법적 인정에 관한 법률 제정·성소수자 인구 통계 파악 및 실태조사) △성소수자의 존재를 범죄화하지 말 것(합의에 의한 동성 간 성관계를 무조건 처벌하는 군형법 92조의6 폐지·HIV 감염인에 대한 차별과 낙인을 유지하는 전파매개행위죄 폐지) △성소수자의 권리를 교육할 것(학생인권조례와 학생인권법으로 청소년 성소수자에게 친화적인 교육환경과 교육과정 마련·‘전환치료 및 탈동성애’ 금지) △성소수자의 집회의 자유를 보장할 것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선동하는 보수개신교와의 결탁을 중단하고, 정교분리 원칙에 따른 의정활동에 충실히 임할 것을 요구했다.
보다시피 요구사항 대부분은 국회를 향한 것이다. 누군가는 혹시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을까? 국회에 무언가를 요구한다고 하면 국회의원들에게 이야기하면 되지, 거리에 모여서 이야기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말이다. 집회의 규모가 커지고 다른 ‘시민’들에게 더 많은 ‘불편’을 끼칠수록 이런 의문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다.
집회가 중요한 이유는 일단 그런 적극적인 행동이 결정권자들에게 압력이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모이는 데는 품이 드는데, 이를 감수하고 거리에 모여 함께 무언가를 요구한다면 온라인상에 모인 여론보다 훨씬 큰 압력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경험으로 그런 힘을 보여줄 때 결정권자들이 변화를 택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그중 가장 많은 이들이 알 만한 사례를 언급하자면, 몇 년 전 국회의원들과 재판관들이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파면을 결정하게 만든 것은 분명 거대한 규모의 촛불집회다.)
집회는 내부적으로도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자신만의 삶터와 일터에서 뿔뿔이 흩어져 많은 것들을 그러려니 하고 참고 살던 개개인들은, 집회의 인파 속에서 자신이 혼자가 아님을 확인한다. 자신과 동일한 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들, 동일한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본 개인은 자신의 요구가 정당하다는 확신과 싸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는다.
주디스 버틀러는 저서 <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민이 거리에 대규모로 운집할 때 여기서 드러나는 분명한 함의 하나는 다음과 같다. 그들은 여전히 여기에, 여전히 거기에 머무르고 지속할 것이며, 집회를 통해 그들 모두가 놓인 상황을 공유하고 있음을 천명하거나 혹은 그런 상황을 함께 깨닫기 시작하고 있음을 보여줄 것이다. (중략) 한데 모인 신체들은 “우리는 폐기 가능한 이들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이 말하는 바는 “우리는 끈질기게 버티면서, 보다 큰 정의와 불안정성으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살 만한 삶에 대한 가능성을 요구하면서 여전히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혼자서는 당연히 어렵다. 그러나 함께라면 다르다. 변화는 우리 내부에서부터 일어나서, 결국 우리의 삶터 곳곳에 번질 것이다.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며 보다 큰 정의와 불안정성으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살 만한 삶에 대한 가능성을 요구하자. 고민하는 그대, 거리에서 만나자.
퀴어노동법률지원네트워크 (qqdong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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