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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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진 공인노무사(퀴어동네 운영위원)

지난해 말부터 여의도에서, 광화문에서, 한남동에서 집회가 열리는 동안 셀 수 없이 많은 시민이 윤석열을 탄핵해야 한다고, 처벌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언론 안팎으로 가장 주목받은 존재들은 단연코 20대, 30대 여성이다. 그럼 그 다음으로 눈에 띄는 존재들은? 성소수자일 것이라 생각한다.(두 집단에는 당연하게도 교집합이 있다)

집회에서 모든 발언을 귀담아 들으려 노력하기는 하지만, 더 숨죽이고 집중해 듣는 대목이 있다. 자기소개다. 개인적으로 자기소개란 정말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자신이 가진 여러 모습 중 현재 앞에 있는 상대에게 보여주고 싶은 모습을 잘 선별해 내놓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떤 모습은 내가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습이 아니더라도 인정을 받을 것 같아 일부러 꺼내놓기도 하고, 어떤 모습은 나의 많은 부분을 이루고 있고 내가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임에도 숨기기도 한다. ‘내가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밝혔을 때 상대방이 보일 반응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최근 시민 발언에서 인상적인 점은 자신의 성적지향과 성 정체성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나이, 지역과 함께 ‘레즈비언, 동성애자,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젠더퀴어, 에이섹슈얼’ 등이 나란히 언급된다. 자연스럽게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머뭇거리다 용기내서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처음으로 이야기해보는 거라며 커밍아웃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자기소개를 듣다보면 약간은 울컥한 마음으로 박수를 치게 된다.

어떻게 그런 용기를 내게 됐을까 생각해본다. 집회 장소에서 휘날리는 무지개 깃발들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처음으로 발언대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밝힌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그 소개에 환호로 화답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무지개색 투쟁 머리띠를 매고 다니는 사람들, “여자도 남자도 좋아 한다”라는 말에, “괜찮다!” “문제없다!”고 화답한 사람들, 탄핵 이후 성소수자가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인터넷상에서는 이런 흐름을 부담스러워하거나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도 발견되지만, 최소한 광장은 야유와 혐오가 허용되지 않는 분위기가 됐다. 성소수자를 잘 몰랐다는 사람들, 주위에 성소수자가 없었다는 사람들도 그 존재를 확인하고, 많이 배워간다며 고백하고 있다. 광장을 시작으로 사회는 변해가고 있다. 앞으로 차별금지법을 이야기할 때는, 동성혼을 이야기할 때는, 지금과는 또 다른 지형 위에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조금 더 바란다면 광장의 변화가 일터로, 학교로, 일상으로 이어졌으면 좋겠다. 일터에 무지개가 있다면, 처음 용기를 내는 사람과 그에 화답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일터도 광장과 같은 해방의 공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년 전 이 지면에 처음 글을 쓰면서, “법과 제도는 물론이고 사회의 분위기도 저절로 변하지 않는다. 변화를 열망하는 당사자들과 지지자들의 목소리가 쌓이고 쌓여야 변화를 만들 수 있다. 몇 백 명의, 몇 천 명의, 몇 만 명의 변희수 하사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기를, 그 목소리들을 모아 공고한 벽을 허물고 ‘내’가 ‘나’로서 존재하면서도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사회를 함께 만들 수 있기를, 새해를 맞아 새삼스레 또 소망해 본다”고 썼다. 어쩌다 마주한 정국 탓에 소망이 이뤄지고 있는 것 같다. 이야기는 시작됐다. 그러니 우리가 원하는 사회도 곧 올 것이다.

퀴어노동법률지원네트워크 (qqdong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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