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가족

칼럼

▲ 김시운 공인노무사(퀴어동네 부대표)

“가족과 함께 살려면 나를 완전히 버려야 해” 나는 생생히 기억한다. 분노와 서러움에 치를 떨던 친구의 목소리를. 동성애인이 있다는 걸 부모님께 들킨 친구는 끔찍한 언어폭력에 시달렸고, 본가에 사는 조건으로 이성애자로 살 것을 맹세하는 ‘이성애 각서’를 종용받았다. 경제적 독립이 어려웠던 친구는 그 각서에 사인한 뒤 모멸감에 몇 달을 끙끙 앓았다. 홍석천은 되는데, 내 자식이 성소수자로 살면 안 되는 주요 골자는 혐오의 손가락질에 상처받을 자식의 삶이, 혼자 외롭게 고립되어 죽을 자식의 노후가 걱정돼서였다.

이런 걱정은 친구 부모님이 발 딛고 있는 세계로 한정하면 일면 타당하다. 그들은 똑같이 사람으로 살아 숨 쉬는 성소수자의 생생한 삶을 옆자리에서 목격한 적이 없다. 그들이 자식의 삶을 조금이라도 이해해 보려고 인터넷 검색을 하면 자극적인 거짓 혐오 글이 판을 치고, 성소수자의 존재를 찬반 대상으로 격하하는 양비론이 유력 미디어에 등장한다. 그들이 지지하는 ‘나중에 정치’ 민주당은 기독교 혐오세력에 굴복하고도 부끄러움이 없다. 부모님이 그 모든 혐오를 만든 것은 아니지만, 자식의 ‘나답게 사는 삶’을 부정함으로써 혐오에 무거운 벽돌 한 장을 더 얹는 것은 아닐까. 더 나아가 성소수자가 발 딛고 있는 세계에서, 성소수자의 삶은 부모님의 걱정대로 정말 불행하기만 할까.

혈연 가족 안에서 내 편을 찾지 못한 성소수자들은 원가족 울타리 밖에서 ‘나답게 사는 삶’을 만들고자 저마다의 방식으로 조용히 투쟁한다. 법적 인정은 받지 못해도 결혼식을 올리거나, 외국에 가서 혼인신고를 하기도 한다. 「언니, 나랑 결혼할래요?」의 저자 김규진 씨는 동성결혼으로 회사에서 경조휴가를 받고, 동사무소에 혼인신고를 접수했다.(원래 접수도 안 되었지만, 이제 접수 이후 불수리 통지한다.)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사실혼 관계로 오래오래 동거하는 커플도 많다. 혹은 유성애적인 연인 관계가 아니더라도 친구들과 커뮤니티를 꾸리기도, 반려동물과 함께 살아가기도 한다. 이렇게 성소수자들은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에 포섭되지 않는 대안가족을 이미 각자의 사적인 삶에서 만들어가고 있다.

그러나 사적 영역에만 방치된 대안가족 구성원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절반 정도만 행복하고, 절반 정도 불행하다. 행정·교육·보건의료·주거·노동 등 삶을 영위하는 데 필수적인 영역들은 법 제도가 승인한 가족 관계만을 중심에 놓고 운영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가족 개념을 이성애적 결합에 국한해 협소하게 규정해 대안적인 가족 관계는 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 없다. 물론 국가인증마크가 붙어야만 당사자가 행복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더 넓은 가족 형태가 법 제도로 보장된다면, 우리는 본인에게 자연스럽고 행복을 주는 다양한 관계들을 더욱 적극적으로 탐색하고, 인생을 계획할 수 있다.

꼭 성소수자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혼인과 혈연을 넘어서는 가족 구성의 보장에 대해 사람들은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여성가족부가 2020년 성인 1천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69.7%가 “혼인, 혈연이 아니어도 주거와 생계를 공유한다면 가족이라 여길 수 있다”고 답했고, 70.5%가 “사실혼, 비혼 동거 등 법률혼 이외 혼인에 대한 차별 폐지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삶의 형태가 다양해지고 있는데, 법 제도가 너무 늦어 사회 분위기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이미 아시아 국가 중 대만, 네팔, 태국(예정)에서 동성혼이 법제화됐다. 일본 역시 총인구의 84%에 해당하는 지방자치단체에서 동성파트너십 제도가 마련되고, 여러 혼인평등 소송이 진행되고 있을 정도로 논의가 진전됐다.

한국에서도 구시대적인 이성애 중심의 가족 범위를 넘어서는 입법이 필요하다. 실제로 21대 국회에서는 동성혼 법제화(민법 개정안), 생활동반자법, 비혼출산법 등 ‘가족구성권 3법’이 발의되었다. 그러나 민주당의 동의 없이 법안은 통과되기 어렵다. 22대 국회에서도 마찬가지다. 모든 사회 진보에는 기존 체제를 수호하는 반대 여론이 있기 마련인데, 진보의 방향에 동의한다면 그 반대를 설득하고 넘어서는 것이 정치 집단의 몫이다. 민주당은 ‘사회적 합의’라는 비겁한 방패 뒤에 숨지 말고 적극적인 입법 과정을 통해 그 합의를 만드는 주체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나 시민은 국회만 쳐다보고 있을 수 없다. 각자 서 있는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그저 살아내야 한다. 삶은 투쟁이다. 본인을 긍정하고, 사랑을 나누고, 싸우고, 울고, 산책하고, 춤추고, 술 마시고, 노동하면서 서로 버팀목이 되어주는 것. 진짜 ‘가족’이라면 사회의 혐오에 굳이 벽돌 한 장 얹지 않고 따뜻한 포옹으로 삶을 있는 그대로 안아주는 것. 그리고 필요를 느낀다면 친구나 동료에게 존재를 숨기지 않고, 옆에 이런 삶도 똑같이 살아가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 일터와 삶터에서 원하는 것이 있다면 내 편을 하나씩 만들어 함께 당당히 요구하는 것. 우리가 뭉치면 못 할 것이 없다는 자신감을 가지는 것. 정치와 법 제도가 바위처럼 움직이지 않아도 냉소는 잠깐만 하고, 무력함과 체념을 넘어서는 더 큰 파도로 움직이는 것. 집채만 한 파도는 바위를 우리가 원하는 곳으로 움직일 것이다.

퀴어노동법률지원네트워크 (qqdong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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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에 대한 편견과 혐오를 벗어던질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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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울 공인노무사(퀴어노동법률지원네트워크)

2020년 8월 한 노동자가 기계에 엄지손가락이 말려 들어가 절단 사고를 당했다. 그는 접합 수술을 위해 병원을 찾았지만 스무 번 넘게 치료를 거절당했다. 약 13시간 만에 그는 한 개인병원에서 수술할 수 있었지만, 엄지손가락의 기능을 상당 부분 상실했다.1) 그는 HIV 감염인이었다.

노동자가 건강을 지키는 데에는 혼자 노력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일하다 다치지 않기 위해 주의를 기울여도 업무량과 속도에 의해 사고는 발생할 수 있으며, 아프기 전에 쉬려고 해도 아파도 마음대로 못 쉬는 게 현실이다. 그렇기에 산업안전보건법은 사업주의 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누군가에게 고용돼 종속적인 노동을 제공하는 자의 건강은 그를 고용한 주체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사업주가 의무를 다하지 않아서, 또는 의무를 다했더라도 업무상 사고나 질병은 발생할 수 있으며, 이때 국가는 노동자에게 적절한 치료와 노동력 상실에 대한 보상을 제공한다. 한 노동자의 건강은 공동체가 함께 지키는 것이다. 그 공동체가 차별과 혐오로 오염돼있다면, 구성원 그 누구도 온전히 건강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질병을 둘러싼 은유들은 어떤 질병에 낙인을 찍으며, 좀 더 나아가서는 질병을 앓는 사람들에게 낙인을 찍어 놓는다.” – <은유로서의 질병> 수전 손택 지음

수전 손택은 질병이 단순히 아픈 증상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어떤 질병은 질병을 앓고 있는 환자에게 수치심을 불러일으켜 오히려 질병을 치료하는 데 악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그는 ‘에이즈’를 예로 들면서 ‘감염병’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사회에서 재구성되는지, 그리고 감염병을 지닌 몸을 어떻게 대하는지 설명한다. 감염병은 국가적 차원에서 무찔러야 하는 적으로 여겨지고, 보균자의 몸은 전투가 벌어지는 전쟁터로 여겨진다. 동시에 질병의 보균자는 타인에게 전파할 가능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잠정적 가해자로 여겨져 사회로부터 격리된다. 그 과정에 감염인의 인격은 제거되고, 종종 모두를 위험에 빠트린 ‘빌런’처럼 취급되기도 한다. 코로나19 초반에 슈퍼전파자, 이태원, 종교단체 집단감염자 등 특정 감염인들을 비난하고 공격했던 것과 유사하다. 그러나 감염병은 혼자 있으면 발생할 수 없다. 사회에서만, 즉 우리가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 질병의 형태가 감염이다. 그런 감염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고, 그를 격리한다고 치료되거나 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감염병에는 ‘징벌’ ‘죽음’ 등 추가적인 은유들이 더 붙기도 하는데, 대표적인 질병이 HIV 감염이다. 질병관리청의 자료에 따르면 2021년 보건당국에 HIV 감염이 확인된 내국인의 95.5%가 치료제를 복용하고 있으며, 이들 중 96.0%는 바이러스가 억제된 상태다. 즉, HIV의 전파성은 상당 부분 통제되고 있고, 질병관리청은 HIV 감염을 이제 고혈압이나 당뇨병 같은 만성질환과 다를 바 없다고 밝히기도 했다. HIV를 가진 채 건강한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HIV는 종종 죽음을 연상시키고, 감염인의 삶은 지워진다. 충분히 건강한 HIV 감염인을 아프게 한 것은 그의 감염 사실이 아니라, 질병에 덧씌워진 편견과 혐오이다.

WHO가 코로나 팬데믹 종식을 선언한 지 1년이 돼 간다. 우리는 대부분 누군가에 의해 감염당했고, 누군가를 감염시키기도 했다. 코로나 19바이러스는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 기존의 감염병에 대한 은유를 사용하면 우리는 적과 함께 사는 방법을 찾은 것이다. 감염병을 적으로 여기고 절멸시키는 전략으로는 감염병을 막아낼 수 없다. 사람이 없어져야 바이러스도 절멸할 테니 말이다. 감염병을 적으로 여기지 않고, 보균자를 전쟁터로 여기지 않아야 한다. 감염의 전제조건은 ‘우리’이고, 우리의 전제조건은 ‘서로’다. 서로가 있기에 우리는 감염할 것이고, 감염될 것이다. 편견과 혐오를 벗고, 감염병을 마주할 때 비로소 우리는 서로를 살릴 것이다.

퀴어노동법률지원네트워크 (qqdong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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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휘말린 날들>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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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쯤 성소수자 국회의원을 볼 수 있을까

칼럼

▲ 여수진 (퀴어동네 대표, 공인노무사)

선거에서 성소수자는 어떤 존재일까. 성소수자도 국민의 한 사람이기에 소중한 한 표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 각양각색의 공보물을 펼쳐놓고 누구에게 한 표를 행사해야 삶이 나아질지 고민하는 것도 다를 바가 없다. 쉴 새 없이 들려오는 총선 뉴스 속에서 눈길을 끌 만한 소식이 있었다. 집회에서 자주 보던 군 인권활동가가 더불어민주연합의 국민추천 비례대표 후보가 됐고, 국민투표에서 1위를 했다는 소식이었다. 그러나 “동성애자 국회의원 나오나”라는 보수·개신교 신문의 득달같은 보도와 극우 개신교의 강력한 반발이 이어졌고, 당 차원에서 그를 컷오프(공천 배제)했다는 소식이 연달아 들려왔다. 선거 뉴스를 보는 심장박동 수가 갑자기 올라갔다. 양심적 병역거부 활동을 ‘병역기피’라고 하는 컷오프 핑계는 궁색하고 모욕적이었다. 당 관계자의 입에서 “종교계에서 반발이 거셌다”는 설명이 흘러나왔다. 그가 성소수자라서 문제가 된 것이 자명해 보였다.

선거 국면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모욕은 익숙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다. 강렬했던 최근 기억은 2017년 대통령 후보 토론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촛불로 전 대통령을 탄핵하고 국민 저마다의 정치적 효능감이 하늘을 찔렀던 그때, 퀴어 친구들과 맥주 캔을 들고 단톡방에서 대화를 나누며 토론회를 봤다. 그때 인권변호사 출신인 유력 대선후보 문재인 입에서 ‘(동성애를)반대하죠’ ‘동성애 합법화는 반대합니다’라는 말이 나왔다. 멀쩡히 살아있는 존재들이 TV를 보며 맥주를 마시다가 부인당하고 불법이 됐다. 단톡방이 갑자기 얼어붙었다. 광화문에서 적폐 청산을 외친 수많은 깃발 중에 무지개도 꽤 지분이 있었건만 새로운 나라에 성소수자들은 시민으로 초대받지 못했다. 말은 칼이었고 여럿이 깊게 베였다.

성소수자가 벽장을 나와 공론장이나 공적 영역에 등장하는 것을 사회는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축제의 광장은 매년 쉽게 열린 적이 없고, 군대가 변희수에게, 숙명여대가 트랜스젠더 신입생에게, 감리교가 성소수자를 축복한 목사에게 한 일을 우리는 보았다. 보이는 족족 망치로 때려 땅 위로 올라오지 못하게 막아야 하는 두더지 게임처럼, 유독 성소수자는 사적영역에만 머물 것을, 보이지 않을 것을 강요당한다. 젠더에 따른 정체성을 지우지 않으면 사회에 머무를 자격을 얻을 수 없는 것. 이것을 차별이라 부른다. 그래서 “차별에 반대하지만, 주변에 성소수자가 없었으면 좋겠다”라거나 “차별은 반대지만 동성결혼은 시기상조”라는 말은 ‘뜨거운 아이스아메리카노’와 같이 모순이다.

민주시민이라면 커밍아웃한 성소수자가 내 가족, 직장동료, 이웃, 며느리(혹은 사위라고 불러도 괜찮다), 내 아이의 선생님, 국회의원이나 대통령, 누구라도 될 수 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 시대에 필요한 민주주의 정신은 지배층 가부장 남성만 사람으로 대접받았던 신분제를 타파하고 여성, 노동자, 어린이, 장애인, 이주민 등 다양한 존재들이 자기 모습 그대로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게 된 것에 있다고 믿는다.

그럼에도 여전히 21대 국회를 사람으로 표현하면 ‘55세 SKY대학을 나온 남성’이라고 한다. 선거철마다 후보들이 빨강, 파랑, 노랑, 녹색 등 다양한 색 옷을 입고 춤추는 것을 보면 퀴어퍼레이드라도 온 것 같은 착시가 생기지만 뽑고 나면 결국 또 50·60대 특권층의 가부장 남성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은 변한 적이 없다. 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의식이 성소수자를 시민으로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낙후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소수의 특권층 가부장이 모여 누가 시민이 되고 누가 시민이 될 수 없는지 판단하고 극우 교회집단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작금의 상황이 문제다.

국민투표 1위를 하고도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반대를 당하고 자격이 취소될 수 있는 세상이라면, 개개인의 공적 공간인 일터에서 성소수자 국민의 자리는 어떻게 지켜질 수 있을까. 성소수자인 채로는 비국민으로 살아야 하는가. 22대 국회 임기 중인 2027년이면 차별금지법이 처음 발의된 지 20년이 된다. 부디 새로운 국회는 그동안 평등에 대한 책무를 방기한 것을 반성하고 차별금지법 제정으로 그 빚을 갚길 바란다.

퀴어노동법률지원네트워크 (qqdong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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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은 화장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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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진 공인노무사 (퀴어동네 운영위원)

“차별이 뭘까요?” 지난해 퀴어동네는 ‘퀴어 노동자를 위한 노동법’이라는 주제로 여기저기서 교육을 진행했다. 교육 중간중간 참가자들에게 경험과 생각을 물었는데, 그중 하나의 질문이었다. 누가 노무사 아니랄까 봐 ‘같은 것을 다르게, 다른 것을 같게’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와중, 한 참가자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차별은 화장실이예요.”

태어났을 때 지정된 성별과 다른 성정체성을 가진 트랜스젠더에게 화장실은 집 밖으로 나오기만 하면 피할 수 없는 중대한 문제가 된다. ‘공중화장실 등에 관한 법률’은 일정 규모 이상의 공중화장실은 남녀를 구분해 설치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삶의 필수 장소지만 성별 이분법 그 자체인 공간 앞에서 트랜스젠더는 고민할 수밖에 없고, 이 문제는 자신이 정체화하는 성별로 ‘완벽하게 보이지 않는’ 경우 더욱 커진다.

국가인권위원회가 2021년 발표한 ‘트랜스젠더 혐오차별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조사에 응한 트랜스젠더 당사자 589명 중 40.9%가 남녀 성별이 분리된 공중화장실을 이용할 때 부당한 대우나 불쾌한 시선이 두려워 자신의 정체성과 다른 성별의 시설을 이용한다고 응답했다. 화장실에 가는 것을 피하려 음료를 마시거나 음식을 먹지 않은 경우도 39.2%나 달했다. 거리가 멀어도 남녀공용이나 장애인 화장실 등을 이용했던 경우(37.2%), 아예 화장실 이용을 포기한 경우(36.0%)도 상당했다. 화장실 문제는 직장에서도 심각하게 발생한다. 트랜스젠더 노동자 156명에게 정체성과 관련해 현재 직장에서 경험한 부당한 대우나 어려움에 대해 물었더니, ‘직장 내 화장실, 탈의실, 휴게소, 헬스장 등을 이용할 때 겪는 어려움’(26.9%)을 1위로 꼽았다.

현재의 성별 이분법적 화장실은 트랜스젠더만의 문제는 아니다. 트랜스젠더 ‘남성’이나 트랜스젠더 ‘여성’이 아닌 논바이너리(성별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남성’과 ‘여성’에 국한하지 않고 자신의 성별 정체성을 정체화하는 사람)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물론이고, 겉모습이 ‘여성답지 않은’ 시스젠더(성별 정체성이 자신의 지정 성별과 일치하는 사람) 여성이나 ‘남성답지 않은’ 시스젠더 남성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자신의 정체성을 매번 애써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최근 가장 크게 이슈였던 것은 2022년 성공회대에서 국내 대학 중 최초로 설치한 ‘모두의 화장실’이다. 성별 이분법적 구분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성중립 화장실’보다 더 확대된 개념의 공간으로, 트랜스젠더 등 성소수자를 비롯해 휠체어 장애인, 성별이 다른 활동지원사와 활동하는 장애인, 생리컵을 쓰는 여성, 보호자가 필요한 어린이와 어르신 등 평소 화장실 이용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모두 편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설치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한 시민단체의 민원에 의해 폐쇄될 위험에 처했지만, 지난 2월 다행히도 존치 결정이 내려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성공회대에 이어 KAIST와 서울대에도 ‘모두의 화장실’ 바람이 불고 있다.

대학 다음은 단연 직장이다. 학생들이 직장인이 되고 나서도, 차별받지 않고 혐오와 폭력에 대한 걱정 없이 마음 편히 사용할 수 있는 화장실이 필요하다. 물론 쉽지는 않을 것이다. 성공회대에서 ‘모두의 화장실’을 만들고자 한 학생들도 ‘그게 필요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되냐, 그 몇 사람을 위해 그만한 비용을 쓰는 게 가치 있는 일인지 증명해 보라’는 말을 수없이 마주하며 무려 5년 만에 설치에 성공했다. 직장에서의 변화를 꿈꾸는 사람들도 같은 질문을 마주하겠지만, 돈보다 노동권이, 오줌권이, 생존권이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함께한다면 변화는 오지 않을까. ‘모두의 화장실’을 위한 논의가 더욱 널리 퍼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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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의 허들을 넘고 넘어야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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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세정 공인노무사(퀴어동네 운영위원)

얼마 전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망한 커밍아웃’ 경험에 관해 이야기했다. 가장 인상적인 사연은 누나의 성적 지향을 알게 된 남동생의 이야기였다.

남동생이 우연히 누나의 성적 지향을 짐작하게 됐고, 딱히 숨길 생각은 없었지만 밝혀야겠다고도 생각하지 않은 누나는 얼떨결에 커밍아웃을 하게 됐다. “나는 여자를 좋아해”라고 담백하게 말한 누나는 남동생이 퀴어 차별적인 말을 하면 어쩌나 살짝 걱정했다. 남동생의 첫 번째 답은 이랬다. “누나도 상의 탈의하고 시위 나가는 그런 페미야?” 몹시 당황하며 넘겼는데, 다음에 오는 말들이 더 가관이었다. “누나도 남성 혐오 같은 거 해?” “애 안 낳는 사람들한테는 비출산세를 걷어야 해” 우리는 누나가 여자를 좋아하든 말든 과격한(?) 페미니스트인지, 남성을 혐오하는 것은 아닌지에만 관심 있는 남동생을 두고 “고도로 발달한 성차별주의자는 앨라이(ally, 성소수자 당사자는 아니지만 성소수자의 인권을 지지하고 연대하는 사람)와 다를 바 없다”라며 깔깔 웃었다.

이 대화 하나로 우리 사회에 산재한 여러 차별 정서를 확인할 수 있다. 성차별에 도전하는 여성은 위험하고 문제적이라는 인식, ‘남성 혐오’가 실재한다는 착각, 혼인과 혈연을 바탕으로 한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 ‘여자’를 획득하고 ‘가족’이라는 집단을 만들어야 인정받을 수 있는 남성 간 배타적 연대, 성애적 대상이 동성인 여성은 남성 집단 자체를 싫어하는 사람이라는 납작한 논리 점프 등. 특히 나를 웃기고도 슬프게 만든 지점은, 앞에 앉은 여성의 성적 지향은 고려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아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성소수자 정체성은 페미니즘에 대한 적대감에 가려 또다시 숨겨지는구나 싶어 슬퍼해야 할지, 혐오는 종류에 따라 경중이 달라지는 것인지 여러 생각이 스쳤다.

지난해 퀴어노동권포럼에서는 ‘직장내 커밍아웃의 조건 찾기’ 실태조사를 진행했다. 현재 일터에서 커밍아웃했는지 물었을 때 응답자의 64.1%가 누구에게도 커밍아웃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이런 조건이라면 커밍아웃 하겠다’라는 질문에는, 직 내에 커밍아웃한 성소수자 동료가 있을 때(62.8%), 직장의 분위기가 소수자 친화적일 때(54.9%), 동성 배우자와의 결혼식·신혼여행에 대한 축의금과 휴가를 보장받을 수 있을 때(33.2%)라는 답변이 가장 많이 선택됐다.

결국 커밍아웃을 잘 할 수 있는 조건은 성소수자를 비롯한 어떤 소수자성에도 친화적인 문화라는 것이다. 하나의 개인은 단층의 정체성으로만 구성되지 않는다. 용기 내 커밍아웃 했지만, 다른 종류의 소수자성으로 차별받는다면 나의 존재가 온전히 받아들여졌다고 할 수 있을까. 레즈비언이면서 페미니스트인 ‘나’가 여성 차별과 폭력에 반대한다는 점을 비난받느라 퀴어인 ‘나’에 대해 말할 수 없다면, 반대로 이성애 규범에 따르지 않는다는 점을 비난받느라 페미니스트인 ‘나’에 대해 말할 수 없다면, 커밍아웃은커녕 반복적으로 ‘나’들을 증명해야 하는 상황에 갇히고 만다.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 위해 넘고 넘어야 할 허들이 계속된다면 커밍아웃은 영영 닿을 수 없는 신기루가 될 것이다.

망한 커밍아웃 이야기 속 남동생이 누나가 과격한 페미니즘에 젖어 남자를 싫어할 것이라 지레짐작하지 않기를 바란다. 대신 퀴어인 누나의 삶과 경험에 관심을 가져 주길 바란다. 결혼과 가족 구성에 관한 생각은 어떤지 궁금해하기를 바란다. 가부장제와 성차별에 관해 진지하게 이야기할 수 있기를 바란다. 누나의 용기를 지지하고 응원해 주기를 바란다. 내가 살아 보지 못한 삶, 내가 가지지 못한 생각에 대해 가까운 사람에게서 생생하게 들을 수 있다는 건, 그걸 토대로 다른 세상을 상상해 볼 기회를 가진다는 건 얼마나 큰 행운인가. 우리는 이렇게나 다르지만 여전히 서로의 곁에 있음을 당연하고도 소중하게 여긴다면 내가 어떤 ‘나’로 존재하는지 애써 설명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다.

 

퀴어노동법률지원네트워크 (qqdong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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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V 감염인이 안전하게 노동할 수 있는 일터

칼럼

▲ 김시운 공인노무사(퀴어동네 부대표)

주변에 HIV(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 감염인 동료가 있었다. 그는 꾸준히 치료받고 운동하면서 나보다 훨씬 건강한 상태를 유지했다. 또한 직장에서 노동을 하고, 일상생활 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딱 한 가지, 본인의 HIV 감염 사실이 혹여나 드러날까 봐 위생과 프라이버시 관리를 철저하게 했다. 같이 음식을 먹을 때 타인과 식기를 공유하지 않고자 강박적으로 노력하고, 회사에서 매년 건강검진을 받을 때 HIV 검사가 포함돼 있는지 항상 체크했다. 감염인의 강박적인 노력(혹은 일상의 불편)은 HIV 그 자체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HIV에 대한 무지와 혐오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의학의 발전으로 HIV 감염인이 꾸준히 치료받는다면 바이러스는 미검출되고(Undectable), 이 상태에서는 콘돔 없이 성관계하더라도 HIV가 전파될 확률은 없다(Untransmittable). 이러한 ‘U=U’는 다수 연구의 결과로서 차별과 혐오로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과학적 사실이다. 조기 검진을 하여 발견하고, 약물복용을 꾸준히 한다면 HIV는 더 이상 삶을 영위하는 데 문제를 초래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은 HIV에 대한 무지와 혐오가 여전히 공고하다. 제7차 세계가치관조사(2017~2021)에 따르면, 조사에 참여한 한국인 중 92.9%가 “나는 HIV감염인과 이웃으로 살고 싶지 않다”고 답했다. 우리 사회가 HIV 감염인을 동료시민으로 대하는데 여전히 매우 부족하다는 뜻이다.

또한 한국은 HIV 감염인의 콘돔 없는 성관계를 형사처벌할 수 있는 ‘전파매개행위죄’(에이즈예방법 19조, 25조2호)가 여전히 살아있는 이상한 나라다. 미검출 상태인지, 성관계로 HIV가 실제 전파되었는지, 사전에 합의했는지 등은 따지지 않고 처벌할 수 있어 많은 감염인을 공포에 떨게 만드는 심각한 인권침해 조항이다. 게다가 감염인이 조기검진을 회피하도록 만들어 공중보건 차원에서도 문제가 있다. 그래서 ‘전파매개행위죄’를 폐지하자는 여론이 오랫동안 있었고, 위헌제청도 있었다. 지난해 10월 헌법재판소는 4(합헌)대 5(일부 위헌) 의견으로 합헌 결정을 했다. 헌재 선고문에서도, 심지어 합헌 의견조차 U=U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헌재가 합헌 결정을 내린 것은 HIV 감염인에 대한 무지와 혐오, 차별이 고스란히 반영된 것이고, 더 나아가 그것을 조장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무지와 혐오는 사회적 낙인으로 작용하고, 감염인 스스로조차 사회적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자기검열’하게 만든다. 한국 HIV 낙인지표조사 공동기획단의 보고서(2016~2017)에 따르면, 감염인 당사자들은 수치심과 “나를 탓하기”, 죄책감 등에 시달린다. 응답자 10명 중 4명은 가족, 친구, 모임 등의 사회적 관계를 포기했다. 혐오가 만든 감염인의 내재적 낙인은 단순한 고립감을 넘어서 인간 삶의 필수인 ‘사회와의 관계맺기’를 어렵게 만든다.

일터는 ‘사회와의 관계맺기’를 가장 일상적으로 하는 공간이다. HIV 감염인들은 일터에서 어떻게 노동하고 있을까. 많은 감염인들은 감염 이후 기존의 직업을 유지하지 못하거나, 새 직업을 선택할 때 관계의 밀도가 낮은 업종과 회사를 선호하게 된다. 채용절차에서 제공하는 군 신체검사 등급정보, 채용신체검사는 물론이고, 채용 이후에도 건강검진, 회사 동료나 상사들과의 대화 등을 통해 본인의 감염사실이 어떤 방식으로든 유출될까 봐 두려움과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일단 질병관리청은 “에이즈는 식사, 운동, 목욕 등 일상생활을 통해서는 감염 불가능하므로 직장 업무, 회식, 음식을 함께 먹는 행위로는 절대 감염될 수 없다”고 알리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와 국제노동기구(ILO) 역시 HIV 감염 자체가 노동자의 직무수행능력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으므로 채용과정에서의 HIV 검사 실시금지를 강력하게 권고한다. 직무와 무관하고, 아웃팅(강제로 공개) 우려가 있는 건강정보를 불필요하게 요구하는 관행에 대해 사용자는 고민할 필요가 있다.

물론 건강검진에 HIV 감염정보가 포함돼 있더라도, 이것을 당사자의 동의 없이 유출하면 형사처벌 대상이다. 그러나 사회의 차별과 혐오는 감염인에게 그 정보를 다루는 사람과 시스템을 불신하게 만든다. 아무리 유출자를 처벌해도, 감염인이 그 회사를 신뢰하며 다닐 수 있을까? 강경한 처벌도 중요하지만, 내 감염 사실이 드러나도 혐오와 배제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신뢰가 있어야 감염인이 안전한 환경에서 노동할 수 있다.

이렇게 회사에서 직간접적으로 본인의 감염사실이 드러나는 것이 두려운 감염인은 노동시장에서 구직의 문턱 자체가 높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위의 낙인지표조사에서 감염인 응답자 중 40.2%가 100만원 이하(2016년 당시 최저생계비 이하)의 저소득 군에 해당했다. 실업과 불안정 노동을 반복하다 가난과 사회적 고립에 고통받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노동은 삶을 유지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데, 감염인에 대한 혐오는 이들이 안정적으로 노동하지 못하게 만들어 감염인의 삶을 흔든다. HIV 감염인의 삶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은 HIV 그 자체가 아니고, HIV 감염인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혐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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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명하지 않아도 괜찮다

칼럼

▲ 한울 공인노무사( 퀴어노동법률지원네트워크)
▲ 한울 공인노무사( 퀴어노동법률지원네트워크)

“선생님, 법적으로 판단을 받는다는 것은 진짜 사실이 무엇인지가 아니예요. 나의 주장을 어느 정도 증명하느냐의 문제인 거죠. 그러니 너무 개의치 마세요.”

2024년 1월23일 오후 2시쯤 걸려 온 전화상담에서 한 이야기이다. 증거 수집이 중요하다는 걸 강조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법적인 판단이 잘못됐어도 그 일이, 그 부당함이 거짓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의 말에 귀기울이고, 부당함에 공감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무언가를 증명한다는 건 자신의 기억과 감정에 의심을 품고 하나하나 증거를 찾아내 설명해 내는 일이다. 이 과정은 고되고 막막하며, 때때로 고통스럽다. 타인의 경험을 증명해 내는 일이 익숙한 나에게도 내 기억과 경험을 증명하는 건 고되고 막막하며, 종종 쪼그라든다. ‘증명’을 매일, 어디에서든 요구받는다면 어떨까.

“트랜스이자 공개적으로 그 사실을 밝힌 사람으로서 나는 늘 사람들에게 나를 믿어달라고 애원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아마 대부분의 트랜스라면 공감할 것 같다. 눈을 찡긋하고 고개를 주억거리는 사람들의 반응에 지쳐버렸다. … 나는 내 몸에 쏟아지는 징그러운 관심, 나를 어린아이 취급하고자 하는 충동에 진력이 난다.” (<페이지보이> 엘리엇 페이지 지음, 밤비 펴냄)

엘리엇 페이지는 <페이지보이>라는 책을 통해 할리우드에서 ‘여배우’로서 겪어야 했던 일들, 2번의 커밍아웃의 경험, 그리고 진화하고 변화하는 현재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는 일터에서 경험한 젠더 디스포리아와 다른 사람의 삶을 연기하는 ‘배우’라는 직업 사이에서 겪는 혼란스러움과 편안함 등 꼬이고 뒤틀린 감각들에 대해서도 써내려 간다. 이 책은 분명 엘리엇의 고유한 경험이지만, 한국에 사는 트랜스젠더와도 통하는 보편성도 있다. 앨리엇에게도 그랬듯, 많은 트랜스젠더는 그냥 존재하기 위해 증명을 요구받는다. 할리우드에서 일하는 배우가 아니더라도, 많은 트랜스젠더 노동자는 일터에서 특별한 설명을 요구받고 그의 존재에 대한 증명을 요구받는다.

“면접관이 혼자 보는 게 아니거든요. 일 대 다수를 보든지, 다수 대 다수를 보던지. 차라리 일 대 일이면 상관이 없는데, 다수 대 다수에서 아웃팅을 당하면 완전 정말 화가 나요. 면접관이 서류 보더니 막 인상이 찌푸려져요. “저기 ○○○씨, 남자세요?” 사람들이 다 나를 봐요. 놀라움과 좀 그런 시선 있잖아요. 그런 표정으로 저를 보면 ‘내가 그렇게 잘못한 건가?’ 왠지 모르게 창피하고, 뛰쳐나가고 싶고. 그럼 어쩔 수 없이 나지막하게, “네”라고. 그럼 이제 거기서 또 호구조사 당하는 거예요. “뭐 어쩌다가 성전환하시게 된 거예요? 여자로 지내는 게 편하세요? 남성으로 지내는데 어쩌고저쩌고….”

“사람들이 저 보면 쟤는 남자야 여자야 물어보는 상황이어서 계속 설명해야 하는 것도 힘들었고요. 그리고 당시에 기숙사 생활했었거든요, 기숙사랑 화장실에서 쫓겨난 경험이 많아요. (중략) 그런 환경에서 지내는 게 쉽지 않았던 것 같아요.”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나, 성소수자 노동자” 두 번째 이야기-둘로 나뉜 세상에서 살아남기>)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 성별 이분법에 의해 여성과 남성 둘 중 하나로 분류된다. 성별은 삶 전반에 걸쳐 ‘여성다움’과 ‘남성다움’으로 끊임없이 재생산해 그의 몸과 정신에 깃든다. 그렇게 대부분은 자신의 성별에 의문을 갖거나 고민하지 못하고, 스스로 성별을 선택할 수 있다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그러면서 두 가지 성별 사이를 떠다니고, 탐구하고, 변화하는 존재를 부정한다. 일터도 마찬가지이다. 화장실, 탈의실, 기숙사, 옷차림 나아가 특정 제스처, 역할 등등 거의 모든 것이 두 가지 성별로 나뉘어 있다. 두 가지 성별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애초에 일터에 진입할 수 없고, 진입했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숨겨야 하며, 드러낸다면 언제든지 쫓겨날 각오를 해야 한다. 분명 일터 내에서 발생하는 폭력이자 차별이다.

지금 이 순간도 일터에서 스스로를 증명해야 하는 많은 이들을 안다. 증명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당신의 목소리가 사라지지 않고, 들려오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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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롭힘을 괴롭힘이라 말하기

칼럼

▲ 여수진 공인노무사 (퀴어동네 대표)

노동상담을 하다 보면 하루에도 몇 번씩 “제가 겪은 일이 직장내 괴롭힘인가요?”라는 질문을 받는다. 직장내 괴롭힘 문제는 속 시원히 해결되는 사례가 드물어 대답 또한 속 시원하게 하기 힘들고 법의 실효성에 대한 한계를 느낄 때도 많다. 그러나 직장내 괴롭힘 금지법이 없었다면 직장의 무수한 을들이 자신의 고통에 대해 어떻게 얘기를 꺼낼 수 있었을까. 노동자의 머리 길이가 귀를 덮으면 공장 경비가 바리캉으로 머리카락을 자르던 시절을 지나 내가 사회 초년생이던 시절에 여성은 화장을 안 하면 회사에 출근할 수 없었다. 지금은 어떤가. 외모 갑질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불필요하게 외모를 지적하는 것에 ‘직장내 괴롭힘’이라는 딱지를 붙일 수 있게 됐다. 고용노동부도 매뉴얼에 ‘옷차림 지적, 뚱뚱하다는 외모 관련 지적이나 농담’이 직장내 괴롭힘이 될 수 있다고 직접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직장내 괴롭힘 금지법은 직장의 무수한 을들에게 문제를 문제라고 말할 수 있는 언어를 주었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그러나 가까운 일본과 우리를 비교해 보면, 아직 직장내 괴롭힘이라는 언어가 모든 노동자에게 평등하게 주어진 것은 아니라는 데 생각이 미친다. 일본은 우리 근로기준법과 비슷한 내용으로 직장내 괴롭힘(power harrassment·파워하라) 금지에 관한 법을 시행하고 있는데, 다른 점이 하나 있다.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적 괴롭힘을 후생노동성(우리의 고용노동부 해당)이 관련 지침에 명시해 규율하고 있다는 점이다.

차별과 가까운 단어 중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괴롭힘이다. 일상에서 알게 모르게 일어나는 구별짓기, 배제, 낙인, 혐오 발언 같은 괴롭힘은 대놓고 하는 차별에 비해 매우 효율적인 차별 수단이 된다. 그 때문에 성소수자와 같이 차별받는 집단은 괴롭힘에도 노출되기 쉽다. 그러나 성소수자가 직장에서 받는 괴롭힘을 밖으로 말하기 위해서는 남들에게 없는 두 가지 큰 장벽을 만난다. 첫 번째는 성소수자라는 사실이 직장에 공공연히 알려지는 것이다. 2차 피해 등 큰 각오가 필요하다. 두 번째 장벽은 내가 받은 괴롭힘이 왜 괴롭힘인지 회사를 설득해야 하는 일이다. 외모 갑질처럼 단순하지 않다. 아웃팅이나 성별표현 강요, 성 정체성 떠보기, 혐오표현 등 성소수자만의 경험과 맥락을 알아야 이해할 수 있고, 기존의 괴롭힘 유형에 포섭되기 힘든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결국 말하기를 포기하게 된다. 포기가 계속되면 결국 직장을 포기하는 일도 생긴다. 성소수자가 직장에서 겪는 일들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고 가려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개별적인 해석이 필요한 직장내 괴롭힘 판단시 현장에서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 바로 행정청의 지침이다. 그 안에 성소수자에 대한 괴롭힘 유형이나 판단 기준을 담겨 있다면 장벽의 높이가 많이 낮아지지 않을까? 일본 후생노동성의 지침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노동자의 성적 지향·성 정체성에 대해서 양해를 얻지 않고 폭로하는 것’ 즉 아웃팅을 명시적으로 금지한다. 또 ‘성적 지향·성 정체성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차별적 언행이나 괴롭힘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안내하며 예방에도 힘쓰고 있다. 표준 취업규칙에도 ‘성적 지향·성 정체성에 관한 언동 등 다양한 직장내 괴롭힘으로 다른 노동자의 취업환경을 해쳐서는 안 된다’고 안내한다.

일전에 쿠팡에서 일하던 성소수자 노동자가 자신에 대한 아웃팅 위협을 가했던 직장 상사를 신고한 사건이 언론을 통해 보도됐다. 어렵게 용기 내 첫 번째 장벽을 넘었을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 장벽은 넘지 못했다. 해당 사건은 끝내 회사와 노동부에서 괴롭힘으로 인정되지 않았고 노동자는 퇴사했다고 전해 들었다. 아웃팅에 대해 명시하고 있는 일본과 같은 기준이 우리나라에도 있었으면 결과가 다르지 않았을까?

차별적 괴롭힘을 차별 유형 중 하나로 보고 이를 고용영역에서 규율하는 내용이 포괄적 차별금지법(평등법)안에 있다. 그러나 알다시피 일부 기독교 세력의 반대로 20년째 표류 중이다. 언제까지 마냥 기다려야 하나. 차별적 괴롭힘은 차별이면서 동시에 괴롭힘이다. 노동부가 차별적 괴롭힘에 노출될 수 있는 다양한 집단과 경우를 지침에 설명하고 규율의 기준을 제시하는 것만으로 입법 미비의 공백을 메우고 현장의 피해를 효율적으로 줄여나갈 수 있다. 변화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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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나’를 숨기지 않아도 되는 일터를 꿈꾼다

칼럼

▲ 손진 퀴어동네 운영위원

새로운 한 해의 시작인 1월,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찬 이 순간이 4년 전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큰 고통의 시간이었던 기억이 난다. 변희수 하사다. 2017년부터 육군 부사관으로 군에 복무하던 변희수 하사는 성별 위화감으로 군 병원 정신과 진료와 심리상담를 받으며 성별 정정 과정을 밟기로 마음먹고, 부대에 이 사실을 알렸다. 소속 군단장으로부터 성확정수술을 위한 국외 휴가 허락을 얻은 변희수 하사는 2019년 11월 수술을 받았고, 복귀해 여군으로 군 복무를 이어가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군은 변희수 하사를 트랜스젠더(태어났을 때 지정된 성별과 다른 성별정체성을 가진 사람) ‘여성’이 아니라 성기를 상실해 심신장애를 가지게 된 ‘남성’으로 보기를 고집했고, 2020년 1월 결국 그녀를 강제전역시켰다. 성별정체성을 이유로 한 차별이자 헌법이 보장하는 원하는 직업을 가질 권리 침해였고, 대안이 전혀 없는 해고였다. 그렇게 어린 시절부터 오로지 군인이 되기만을 꿈꿔 왔던 한 노동자가 일터에서, 이어 세상에서 사라졌다. 2021년 10월 법원은 ‘여성’인 그녀를 ‘남성’으로 전제하고 한 전역처분이 위법하다고 판단했지만, 이를 절실하게 바랐던 노동자는 사라진 후였다.

그런데 변희수 하사와 같이 직장생활 중 불이익을 당한 트랜스젠더 노동자 사례는 오히려 쉽게 접하기 어렵다. 트랜스젠더 노동자는 일단 직장에 들어가는 것부터 어렵기 때문이다. 국가인권위원회의 2020년 11월 ‘트랜스젠더 혐오차별 실태조사’에 따르면 조사에 응한 트랜스젠더 459명 중 성별 정체성과 관련해 직장에 지원하는 것을 포기한 적이 있다는 사람이 269명으로 약 60%에 달했다. 주민등록번호나 사진·출신학교·병역정보 등을 요구하는 채용 과정에서 법적 성별과 자신이 정체화한 성별, 성별 표현의 불일치가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어떤 트랜스젠더 노동자들은 구직이 어려울 것 같아서 성전환을 하지 않기로 하고, 또 다른 트랜스젠더 노동자들은 성전환을 하기 위해 다니던 직장을 퇴사한다. 이는 트랜스젠더 노동자들에게 ‘나’로서 살아가는 것과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은 대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라는 것을 보여준다. 누구나 ‘나’로서 존재하면서 하고 싶은 일에 종사할 권리가 있는데도, 일터에서 성소수자들의 삶은 부당한 선택을 침묵 속에서 강요받는 것의 연속이다.

새롭게 지면을 얻게 된 이 칼럼에서 보다 ‘새롭고’ ‘남들이 쓰지 않은’ 이야기를 쓰고 싶기도 했지만, 결국 일터의 소수자들에 관해서는 항상 그런 글을 쓸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면 위로 떠오르는 사건조차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문제제기를 하면 자신이 소수자라는 것이 널리 밝혀질까 두렵고, 어차피 뾰족한 법과 제도가 없으니 문제제기해도 소용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안타깝지만 그런 생각은 현재로서는 아주 틀린 것만도 아니다.

그러나, 그래서 더욱 많은 이야기들이 있어야 한다. 법과 제도는 물론이고 사회의 분위기도 저절로 변하지 않는다. 변화를 열망하는 당사자들과 지지자들의 목소리가 쌓이고 쌓여야 변화를 만들 수 있다. 통계의 숫자로 압축되지 않는, 비슷한 것 같아도 다 다른 하나하나의 구체적인 이야기들이 필요하다. 용기 있는 목소리들이 쏟아져 나올 때까지, 과거의 이야기를 잊지 않으면서 과거가 반복되지 않게끔 힘을 모아 가야 한다. 몇 백 명의, 몇 천 명의, 몇 만 명의 변희수 하사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기를, 그 목소리들을 모아 공고한 벽을 허물고 ‘내’가 ‘나’로서 존재하면서도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사회를 함께 만들 수 있기를, 새해를 맞아 새삼스레 또 소망해 본다.

퀴어노동법률지원네트워크 (qqdongne@gmail.com)

칼럼

퀴어동네 우리끼리 노동법이 열렸어요!

활동이야기

 

안녕하세요. 한울입니다.

퀴어동네가 추구하는 방향성 중 하나는 퀴어 노동자의 이야기를 모으는 장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취지를 바탕으로 퀴어동네 우리끼리 노동법 기획강좌가 4주간(6월~7월) 진행되었습니다.

총 27명이 해당 교육을 신청해주셨고, 적극적으로 교육에 참여해주셨습니다.

특히 마지막 강의에서는 ‘평등한 일터를 위한 나의 각오, 모두의 각오’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포스터를 제작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서로 다른 일터 경험들을 한 공간에 엮어내는 시간이었습니다.

처음으로 진행해본 기획강좌였는데,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뿌듯하고, 저희도 많이 배우는 시간이었습니다.

앞으로의 기획 강좌도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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