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음마다 사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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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세정 공인노무사(퀴어동네 운영위원)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비가 쏟아지다 갑작스레 그치기가 예측할 수 없이 반복되던 회색의 어느 날. 무지갯빛 우산 사이로 “사랑이 이겼다”라는 외침이 울려 퍼졌다.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7월18일 동성 배우자의 건강보험 피부양자 지위를 인정하는 판결을 내린, 다시 말해 대법원 판결을 통해 동성 동반자의 권리가 최초로 인정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사실관계는 이렇다. 2017년부터 동거를 시작해 2019년 결혼한 동성 부부 중 한 사람이 직장을 그만두면서, 건강보험공단에 문의해 2020년 2월 다른 한 사람의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이 가능하다는 답변을 받아 자격을 취득했다. 그해 10월 두 사람의 이야기가 언론에 보도되자, 공단은 피부양자 등록이 ‘착오 처리’였다며 피부양자 자격을 소급해 상실시키고 지역가입자 자격을 취득한 것으로 변경했다. 이유는 ‘피부양자 인정요건 미충족’, 즉 동성 부부(동반자)는 피부양자 자격이 인정되는 ‘사실상 혼인 관계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취지였다. 부부는 지역가입자 건강보험료 등을 납입하라는 공단 처분의 취소를 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대법원 판결이 있기까지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2022년 1심은 부부의 청구를 기각했다. 판결 중 중요한 부분을 요약하자면, 두 사람의 성별이 같기에 사실혼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부부는 항소했고 2심이 이어졌다. 지난해 2월 재판부는 공단의 처분을 “성적 지향을 이유로 한 자의적 차별”에 해당한다며 1심을 뒤집었다. 이번에는 공단이 불복해 상고심이 이어졌다.

그리고 7월18일, 대법원이 두 사람은 동거·부양·협조·정조의무를 바탕으로 경제적 생활공동체를 형성한 동반자고, 동성 동반자를 피부양자에서 배제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 행복추구권, 사생활의 자유, 법 앞에 평등할 권리를 침해하는 차별행위라고 판단해 마침내 두 사람의 결합이 제도적으로 인정됐다.

판결문에서 전원합의체 판단 이유와 다수의견도 좋았지만, 다수의견에 대한 김상환 대법관과 오경미 대법관의 보충의견이 특히 감동적이었다. 마음을 울린 문장에 밑줄을 그으라면 거의 전부에 그었을 것 같다. 내용 전체를 소개하고 싶지만, 보충의견의 마지막 부분만 옮긴다. 보충의견은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인용하며 천사 미하일이 지상에서 인간으로 있는 동안 만난 쌍둥이 자매를 예시로 들었다. 쌍둥이 자매가 각기 성적 지향에 따라 한 사람은 이성 동반자를, 한 사람은 동성 동반자를 선택했다. 그때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깨달은 천사 미하일의 눈에는 자신을 거둬 준 세묜 부부의 가정공동체나 쌍둥이 자매가 각기 이룬 동반자 관계 모두 애정을 바탕으로 한 가정공동체로서 보호 가치가 다르지 않게 보일 것이라고 두 대법관은 설명했다.

신이 천사 미하엘에게 던진 세 가지 질문 중 마지막 질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 대법원이 인정한 것은 서로를 살게 하는 두 사람의 ‘사랑’은 단 하나의 모습만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랑’은 서로를 알아 보게 하고, 아끼고 보살피게 하며, 결국 서로를 살아갈 수 있게 한다. 보충의견이 밝혔듯, 천사 미하엘의 눈에 사람을 살리는 사랑을 하는 이들의 성별이 같은지 다른지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으로 살아가는 인간이 감히 어떤 사랑은 인정하고 어떤 사랑은 배제하겠다고 하면 천사 미하엘은 아직도 깨닫지 못했느냐며 탄식할 것이다. 편견과 차별을 기꺼이 감내하는 ‘사랑’을, 결합을 결단하게 한 ‘사랑’을, 삶을 가능하게 하는 ‘사랑’을 차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오만한 착각이다. 지금 여기 존재하는 모든 ‘사랑’은 공적으로도 평등해야만 한다.

김용민·소성욱 부부의 승리를 온 마음 다해 축하한다. 승소 소식을 듣고 “해냈다”라고 소리 낼 만큼 기뻤다. 두 사람의 도전 덕분에 ‘숨겨진 나’와 ‘드러내는 나’가 따로 존재하지 않게, 같이 사는 사람의 눈에도, 생판 모르는 타인의 눈에도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이 비치는 세상이 곧 올 거라는 희망이 샘솟는다. 더불어 이번 판결이 있기까지 가까이 또는 멀리에서, 보이지 않는 곳과 보이는 곳에서 응원과 힘을 보태 준 많은 이들이 있었다. 탄원을 보내고, 재판을 방청하고, 유튜브 선고 생중계를 시청하며 실시간 채팅방에 무지개 깃발 물결을 일으킨 모든 사람이 사랑이 이기는 결과를 함께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순간을 만날 때면 평등한 세상이 생각보다 멀지 않은 듯한 기분이 든다. 이 판결로 우리는 평등한 세상을 향한 한 발을 또 내디딘다. 걸음마다 사랑으로, 우리는 차별과 혐오를 넘어 평등을 향해 계속 나아갈 것이다.

퀴어노동법률지원네트워크 (qqdong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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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 해방은 체제 향한 도전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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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시운 공인노무사(퀴어동네 부대표)

퀴어자긍심의 달, 6월을 지나 7월에도 대전퀴어문화축제(1회)와 제주퀴어프라이드(5회)가 개최됐다. 비서울 지역에서도 무지개 깃발을 흔들며 자랑스럽게 행진하는 참가자들의 사진을 보니 6년 전 동인천 북광장의 기억이 떠올랐다.

2018년 9월8일, 1회 인천퀴어문화축제에 있었던 많은 동지에게 그 기억은 혐오세력의 집단적 린치와 혐오범죄, 그리고 트라우마로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날의 폭력사태는 이전에 알지 못했거나, 알았더라도 와닿지 않았거나, 와닿았더라도 혼자만 겪었던 사실을 집단이 함께 경험하게 했다는 점에서 “결과적으로” 긍정적인 면도 있었다. 바로 성소수자를 향한 한국 사회의 혐오와 폭력이 이토록 극심하다는 것, 국가는 이를 방치하는 공범이라는 것, 그리고 그럴수록 우리는 단결하고 연대해서 더 크고 선명한 힘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 사실이다. 조직위원회의 일원으로, 당일 진행요원으로 현장에 있었던 내 머리에 가장 강렬하게 남은 장면은 동인천역까지 5분이면 걸어갈 거리를 경찰과 혐오세력의 봉쇄로 3~4시간에 걸쳐 행진하는 동안, 굴다리 밑에서 “우리는 여기에 있다”를 함께 외치던 순간이다. 혐오세력의 폭력보다, 그 폭력에 맞서 함께했던 친구들과 이름 모를 동지들의 단결감을 더 생생하게 기억한다. 이 선명한 기억은 계속해서 나를 행동하게 만들고, 다른 집회들에 연대하도록 하고, 활동가의 정체성을 소환하도록 했다. 퀴어문화축제의 상징성이 있기에 그만큼 혐오세력의 격렬한 조직이 있었던 것이고, 그로 인해 사회의 구조적 억압과 모순을 너무나도 생생하게 맞닥뜨리면서도, 그에 맞섰던 우리의 힘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개인’이라는 이름으로 숨어있던 퀴어들은 축제에 모여 ‘우리’가 된다. 우리가 퀴어문화축제에 모여서 거리를 행진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저항과 도전의 의미를 띠고 있다. 억압받는 소수자들이 군중으로 모여 사회에 힘과 세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사회적 분위기나 지역, 규모에 따라 축제의 형식과 강조점이 달라져도, 그 본질은 축제를 통해 우리가 한곳에 모이면 수천, 수만 명이 될 만큼 힘이 강하고, 일상에서는 용기낼 수 없던 말과 행동을 할 만큼 당당해지는 경험을 하는 것에 있다. 퀴어문화축제는 우리를 억압하는 체제를 향한 도전과 함께한다. 억압적인 일상(저쪽)과 해방구로서 달콤한 하룻밤의 축제(이쪽). 두 가지 시공간을 분리하지 않고, 축제에서 경험한 정치적 자신감으로 우리의 일상을 바꿔낼 상상력을 가져가는 것이 축제의 진정한 의미다. 특히 서울퀴어문화축제의 경우, 우리는 상징성(대표), 공간성(서울 시내), 규모(15만명의 참가)의 장점을 극대화하도록 이 정치적 공간을 활용해야 한다. 따라서 퀴어문화축제는 그 자체로 정치적일 수밖에 없고, 더욱 정치적이여야 한다.

아쉽게도 최근의 서울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는 축제의 정치적 가능성을 확장하기보다, 상업화, 탈정치화의 방향을 “선택”해 왔다. 행진 차량의 발언으로 참가자를 정치적으로 고무하기보다 케이팝을 트는 활동으로 획일화한 것, 참가자 모두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경험과 분위기를 만들기보다 구획화된 부스와 차량을 축제의 소비자로서 선택하고, 개인적 경험으로 만족하게 만드는 것, 제국주의 국가 대사관들, 사람면역결핍바이러스(HIV) 감염인의 목숨을 저당 잡고 팔아치우는 초국적 제약기업과 파트너십을 맺어온 것이 그렇다. 특히 2024년은 팔레스타인 학살이 현재 진행형인 상황임에도 조직위는 학살 공모자인 미국, 영국, 독일 대사관과 파트너십을 맺어 미국의 핑크워싱에 사실상 공조했다. 길리어드의 행진 차량을 또다시 선정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물론 축제를 향한 국가의 차별과 억압이 여전히 공고하고, 자원이 부족하다는 점에서 이 거대한 축제를 운영하는 조직위의 헌신과 고충을 충분히 공감한다. 그러나 그러한 어려움에 질식돼, 축제를 감시하는 외부자들이 정치적으로 불편하지 않게, 참가자들이 자본주의 체제에 충실하게 적응하는 모범퀴어로 표백되는, 즉 별생각 없이 적당히 즐기다 갈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이 얼마나 많은 변화의 잠재력을 삭제하고 있는지 분명히 직시할 필요가 있다. 당연하게도 더 많은 사람이 오게 하려면 재밌고, 활기차게 축제를 꾸미는 것은 필요하다. 그래서 대중의 시선을 염두에 두면서 축제의 외형을 기획하는 것은 납득할 수 있다. 그러나 축제의 참가자들을 꼭 그 기획의 자본주의적 ‘소비자’ 정도로 수동화시키는 것은 지나친 과소평가다. 음악에 맞춰 춤추는 것은 클럽에서도 가능하고, 부스에 들려 물건을 구매하는 것은 플리마켓에서도 가능하다. 왜 꼭 퀴어문화축제여야 하는가. 억눌린 소수자들이 서울 시내의 도로 한복판을 점령하고, 전복적 경험을 함께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자긍심은 축제 참가자들이 모여서 만드는 에너지에서 출발한다. 퀴어퍼레이드 취지에 맞지 않는 부적절한 외부 기관에 자긍심을 외주화하고, 춤을 추고, 물건을 사는 것만으로는 자긍심이 저절로 생기지는 않는 것이다.

퀴어문화축제는 2000년대 성소수자를 억압하는 한국 사회에 맞선 집단적인 커밍아웃에서 시작했다. 체제와 불화하는 불순분자들이 모여 존재를 지우지 말라고 저항의 목소리를 외친 것이다. 2024년 우리는 여전히 억압받는 불순분자다. 퀴어문화축제의 시작점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를 억압하는 이 체제와 맞서 싸워야 한다. 우리가 해방되는 데 필요한 요구가 무엇인지, 그 요구가 관철된 사회가 어떤 모습일지 함께 상상하고, 토론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것 자체가 저항이다. 많은 사람이 참여하는 저항일수록 힘이 강하다. 우리의 잠재력을 일깨우는 행동의 장으로서, 저항의 공간으로서 퀴어문화축제를 함께 만들어가자. 마지막으로 대전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에서 축제 직전 발표한 팔레스타인 지지 성명의 일부를 공유한다.

“퀴어의 연대는 단순히 성소수자들끼리의 연대를 넘어서 다양한 억압에 저항하는 모든 이들과의 연대를 의미한다. (중략) 퀴어는 권력의 억압에 저항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해 왔으며, 앞으로도 연대할 것이다”

퀴어노동법률지원네트워크 (qqdong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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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법 탄생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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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쁨 법무사 (퀴어노동법률지원네트워크)

얼마 전 내 책상이 유난히 노동법 책으로 어지러웠던 날이다. 집에 손님이 왔다. 함께 식사를 마친 손님은 재미있는 이야기, 이른바 ‘잼얘’를 기대하는 얼굴로 노동법 책을 가리키며 물었다.

“노동법이 뭐죠?”

이윽고 적막이 흐르니 손님은 질문을 바꿨다.

“노동법은 어떤 학문이죠?”

안 그래도 나는 노동법이 낯설다. 노동법을 공부할 때면, 민법이나 헌법을 들여다볼 때와는 다른 느낌이 든다. 이날따라 노동법이 자아내는 매캐함이 뚜렷이 느껴져서 이를 두고 차마 어떤 학문이라 단정할 수 없었다. 대신 손님에게 노동법의 탄생 배경을 늘어놓으며 노동법이 무엇인지 같이 생각해 보기를 제안했다. 노동법은 그 기원이 비교적 명확하다. 기원전이나 고대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최초의 노동법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19세기 영국에서 제정된 공장법이나, 독일에서 제정된 사회보험법 등을 꼽을 수 있겠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자본주의의 안정적인 유지라는 목적과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데에 있다. 근대의 인류는 산업화를 통해 전례 없는 속도의 발전을 이루며 잔혹한 경쟁사회를 맞이했다. 무한한 사적자치와 계약자유의 원칙은 높은 생산성을 목숨으로 지탱하던 노동자들의 재생산까지 집어삼켰다. 이렇게 위태로워진 사회 속에서 자본과 노동의 타협을 위해 고안된 것이 노동법이다. 그러니 이를 두고 단순히 학문이라고 할 수 없고,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 같은 고대 학자 이름을 빌려 그럴싸한 한 줄 정의를 내놓기에도 구색이 맞지 않는다. 노동법은 산업혁명기 공장 기름과 소년공의 땀을 거름 삼아 탄생했고, 지금껏 매연과 분진을 마시며 자라왔을 뿐이다. 인간사회의 보편타당한 도덕률이나 천부적 가치를 천명하기 위한 자연법이랑은 그 태생이 다르다. 쓸모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는 거창한 철학이나 정의에 도달하려는 진리 탐구 대신 노사갈등의 효율적인 봉합과 노동력의 재생산을 위한 이론축적에 최선을 다해야만 했다. 그래서 노동법은 그 젊은 나이에도 우리 사회에 많은 것을 바쁘게 제공해 왔다. 수많은 아동노동자들을 탄광에서 건져내고, 노동자들의 근로조건과 임금을 지켜주며, 노동자들이 자치적으로 단결할 수 있는 권리도 보장해 줬다. 그러나 이런 면모만을 보고 노동법이 오로지 노동자들의 권익과 삶의 질만을 위해 신하는 존재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 탄생 배경을 들여다보면 알 수 있다. 노동법은 노동자들의 손에 죽창 대신 작업 도구가 계속 붙들려 있기를 원하는 자본가들의 안심과 영달에도 이바지했으리라.

“그래서 노동법은 톱니바퀴의 윤활유 같은 거예요. 양피지에 쓰인 학문 같은 이미지는 아니죠.”

나의 장황한 설명을 들은 손님은 잠시 뒤 질문을 이었다.

“그럼 노동법은 역할을 다하면 필요가 없어지게 되나요?”

이 질문에는 바로 대답할 수 있었다. 언젠가 해본 적 있는 생각이었다. “만약 모두가 노동자인 세상이라면, 노동이 두렵지 않은 세상이라면 노동법은 필요하지 않겠죠.”

“차별금지법하고 똑같네요? 차별이 없는 세상이라면, 차별금지법 만들겠다고 이렇게 고생할 필요 없을 테니까요.”

“맞아요. 그런데 차별금지법은 아직 있지도 않다는 게 문제지요.”

나는 손님에게 차별금지법 얘기도 하나 해 줬다. 미국에서는 2019년에 전국적으로 동성결혼이 허용되었지만, 차별금지법은 아직 제정되지 않은 주가 많다. 이런 주에서는 성소수자 노동자가 동성배우자와 결혼은 할 수 있었을지언정 동성결혼을 이유로 직장에서 해고당하는 일도 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성소수자 노동자에게는 차별금지법도 노동법의 일종이군요?”

손님과 나는 시선을 노동법 책으로 다시 옮기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노동법도 차별금지법도 절실한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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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이 가기 전에 당신이 할 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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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수진 공인노무사(퀴어동네)

달력에는 많은 기념일이 있다. 노동자로 시작해 어린이, 어버이, 스승, 성년, 부부까지 기념해야 하는, 이른바 ‘정상가족’의 달 5월을 지나 6월이 되면 바야흐로 ‘비정상’들의 축제가 펼쳐지는 ‘자긍심의 달’(Pride Month)이 시작된다. 지금이 바로 그 시기다. 미국에서 동성애가 불법이었던 1969년 6월, 경찰이 성소수자들의 아지트였던 뉴욕의 주점 스톤월을 급습해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체포했다. 성소수자들은 이에 맞섰고 차별에 대한 항쟁이 이어졌다. 이를 기념해 이듬해 같은 날 미국 최초의 퀴어퍼레이드가 열렸다. 이제 매년 6월이 되면 전 세계 각 도시에서 성소수자들이 거리로 나와 ‘자긍심의 행진’(Pride Parade)과 축제를 펼친다.

성소수자 해방은 아직 멀었지만, 이때만큼은 많은 도시가 자긍심에 화답한다. 런던·뉴욕·토론토·방콕·도쿄…. 세계 각국의 거리에는 한 달 내내 성소수자의 상징인 무지개 깃발이 걸리고 시장은 프라이드 행진에 나와 사람들과 인증사진을 찍고 축하의 메시지를 보낸다. 디즈니·레고·코카콜라·나이키 등 수많은 기업이 성소수자를 지지하는 마케팅 이벤트로 소비를 자극하고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치앙마이 철교,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등 도시를 상징하는 건축물이 무지개로 옷을 바꿔 입기도 한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분위기를 찾아보기 힘들다. 서울시는 자긍심의 달 축하 메시지는커녕 축제를 위한 광장조차 쉽게 내준 적이 한 번도 없다. 최근 10여 년간 서울 퀴어퍼레이드가 7월의 폭염 속에서 진행된 것도 그 덕분이다. 올해는 운 좋게도 6월에 서울 퀴어문화축제가 개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을지로와 남대문·종로 등 서울의 중심부를 관통하는 대대적인 퍼레이드에도 행진 대오 외에 성소수자를 지지하는 무지개를 보기는 힘들었다. 무려 15만 명이 한날한시에 모여 춤을 추고 소리를 지르고 깃발을 흔들며 행진했건만, 이 도시는 올해도 있는 힘껏 두 눈을 꾹 감고 모른척했다.

어찌하랴. 아무리 존재를 지우려 해도 ‘우리가 여기 있다’고 외치며 굴하지 않는 긍정의 힘이야말로 축제가 계속돼 온 힘이고 역사였다. ‘동성애는 죄’라며 면전에 저주를 퍼붓는 사람들에게 ‘사랑은 혐오보다 강하다’고 그들 신의 가르침을 되돌려주고, 서로를 축복하고 부둥켜안고 춤을 추며 행진을 이어 왔다. “당신 자식이 동성애자여도 괜찮냐?” “며느리가 남자라니” 같은 오래된 혐오의 수사는 “응 내 자식 퀴어~” “여자 사위? 너무 기대됨, 남자 며느리? 오히려 좋아!” 같은 피켓 문구 속 퀴어의 해학으로 무력화된다. 이 지독하고 눈물겨운 긍정과 전복의 힘은 차별과 배제 속에서도 스스로를 부정하지 않으며 살아갈 힘을 준다.

그러나 광장에서 돌아가 각자의 일상에서도 이러한 힘을 이어 가기 위해 꼭 있어야 할 게 있다. 바로 성소수자와 연대하는 동료의 존재다. 한 사람의 작은 지지가 일터의 공기를 바꿀 수 있다. 책상에 무지개 손깃발 꽂아 놓기, 성소수자 관련 배지나 버튼을 가방에 달기, 혼인평등법이나 차별금지법 등에 지지 발언 하기, ‘남친’이나 ‘여친’ 같은 말은 버리고 성중립적인 표현 사용하도록 노력해 보기. 어떤가? 어렵지 않다. 성소수자에 관한 영화나 책을 보고 자신의 경험과 사고의 폭을 넓혀 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노동조합원이라면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포용할 수 있는 복지제도나 성별 이분법적인 유니폼·시설에 대해 동료들과 토론하고, 권한이 있는 인사담당자라면 동성 결혼에도 경조휴가를 부여하고 채용공고에 ‘채용 과정에서 소수자를 차별하지 않는다’는 문구를 명시하는 것을 추진해 볼 수도 있다.

이러한 노력은 비단 성소수자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평등의 결과는 누구에게나 골고루 돌아온다. 성소수자가 안심하고 다닐 수 있는 일터는 당신이 질병이나 재산·학력·건강·이혼이나 결혼 여부, 가족 형태 등으로 어떠한 개성을 가졌든 낙인에서 더 안심할 수 있는 직장이다. 성소수자에 대한 작은 지지와 변화에 용기를 내보자. 6월이 가기 전에.

퀴어노동법률지원네트워크 (qqdong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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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함께 모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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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진 공인노무사(퀴어동네 운영위원)

지난 17일은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이었다. 세계보건기구가 1990년 5월17일 국제질병분류를 개정하며 “동성애”를 정신장애 부문에서 삭제하고 ‘성적 지향만으로는 장애로 간주되지 않는다’고 명시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한국에서는 매년 인권시민사회단체가 공동행동단을 꾸려 성소수자 차별과 혐오의 문제를 알리고 변화를 촉구하는 집회와 캠페인 등을 한다. 퀴어동네도 당일 저녁 집회가 열린 보신각에 모였다.

올해는 △성소수자의 존재를 법과 제도에 반영할 것(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동성결혼 법제화·생활동반자법 제정·성별의 법적 인정에 관한 법률 제정·성소수자 인구 통계 파악 및 실태조사) △성소수자의 존재를 범죄화하지 말 것(합의에 의한 동성 간 성관계를 무조건 처벌하는 군형법 92조의6 폐지·HIV 감염인에 대한 차별과 낙인을 유지하는 전파매개행위죄 폐지) △성소수자의 권리를 교육할 것(학생인권조례와 학생인권법으로 청소년 성소수자에게 친화적인 교육환경과 교육과정 마련·‘전환치료 및 탈동성애’ 금지) △성소수자의 집회의 자유를 보장할 것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선동하는 보수개신교와의 결탁을 중단하고, 정교분리 원칙에 따른 의정활동에 충실히 임할 것을 요구했다.

보다시피 요구사항 대부분은 국회를 향한 것이다. 누군가는 혹시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을까? 국회에 무언가를 요구한다고 하면 국회의원들에게 이야기하면 되지, 거리에 모여서 이야기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말이다. 집회의 규모가 커지고 다른 ‘시민’들에게 더 많은 ‘불편’을 끼칠수록 이런 의문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다.

집회가 중요한 이유는 일단 그런 적극적인 행동이 결정권자들에게 압력이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모이는 데는 품이 드는데, 이를 감수하고 거리에 모여 함께 무언가를 요구한다면 온라인상에 모인 여론보다 훨씬 큰 압력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경험으로 그런 힘을 보여줄 때 결정권자들이 변화를 택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그중 가장 많은 이들이 알 만한 사례를 언급하자면, 몇 년 전 국회의원들과 재판관들이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파면을 결정하게 만든 것은 분명 거대한 규모의 촛불집회다.)

집회는 내부적으로도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자신만의 삶터와 일터에서 뿔뿔이 흩어져 많은 것들을 그러려니 하고 참고 살던 개개인들은, 집회의 인파 속에서 자신이 혼자가 아님을 확인한다. 자신과 동일한 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들, 동일한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본 개인은 자신의 요구가 정당하다는 확신과 싸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는다.

주디스 버틀러는 저서 <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민이 거리에 대규모로 운집할 때 여기서 드러나는 분명한 함의 하나는 다음과 같다. 그들은 여전히 여기에, 여전히 거기에 머무르고 지속할 것이며, 집회를 통해 그들 모두가 놓인 상황을 공유하고 있음을 천명하거나 혹은 그런 상황을 함께 깨닫기 시작하고 있음을 보여줄 것이다. (중략) 한데 모인 신체들은 “우리는 폐기 가능한 이들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이 말하는 바는 “우리는 끈질기게 버티면서, 보다 큰 정의와 불안정성으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살 만한 삶에 대한 가능성을 요구하면서 여전히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혼자서는 당연히 어렵다. 그러나 함께라면 다르다. 변화는 우리 내부에서부터 일어나서, 결국 우리의 삶터 곳곳에 번질 것이다.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며 보다 큰 정의와 불안정성으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살 만한 삶에 대한 가능성을 요구하자. 고민하는 그대, 거리에서 만나자.

퀴어노동법률지원네트워크 (qqdong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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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희진의 말 “맞다이로 들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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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세정 공인노무사(퀴어동네 운영위원)

기자회견의 새 역사를 쓴 민희진 어도어 대표. 잠들기까지 초 단위 영상을 보고 또 보고, 친구들과 실시간으로 카카오톡을 주고받으며, 만나는 사람 거의 모두와 기자회견 봤느냐는 이야기를 꺼냈다. 민희진의 기자회견을 보며 감탄했고, 공감했고, 전율했다. 그래서 겨우 2주밖에 지나지 않은 이 시점에 민희진의 기자회견에 관해 쓰지 않고서는 참을 수 없었다.

분명히 밝힌다. 이 글에서 이야기하려는 것은 민희진의 기자회견에 여성 직장인이 열광하는 이유다. 경영권 탈취 의혹, 멀티레이블 체제 운영구조, K팝 산업의 명과 암, 민희진 개인의 성격과 갑질 논란 등은 그에 대한 다른 글에서 이야기하길 바란다. 민희진에게 과오가 있다면 책임지면 된다. 솔직히 남성 제작자나 대표들에 관한 숱한 논란에는 이런 논의가 따라오지 않거나, 따라오더라도 가볍게 넘어가기에 더더욱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것도 있다.

기자회견을 보며 느낀 바를 글로 옮겨야겠다고 생각하게 만든 여러 지점이 있었지만, 결정적인 것은 민희진의 기자회견을 두고 (왜인지 성별이 예상되는) 몇몇 반응 때문이다. 파란색 모자에 초록색 줄무늬 맨투맨 차림, “개저씨” “맞다이”를 비롯한 각종 비속어와 욕설 사용, 화를 내고 우는 모습은 공식 석상에 어울리지 않는다며 객관적인 반박이 어려우니 감정에 호소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들이다.

이런 반응은 전혀 새롭지 않다. 분노가 차오르지만 잠 못들 만큼 길길이 날뛸 일은 아니다. 그저 놀랍다. ‘여성은 감정적이야’ ‘여성은 논리적이지 않아’ ‘여성은 공적인 주체가 될 수 없어’라며 ‘잘난’ ‘여자’의 발언을 어떻게든 깎아내리려는 지칠 줄 모르는 시도가 계속 등장하는 사태가 말이다.

민희진 기자회견으로 2021년 하이브 기업설명회가 다시 회자됐다. 당시 기업설명회에 등장한 발표자 12명 모두 남성이었고, 사내·사외이사 역시 전부 남성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기업설명회에서 하이브가 제시한 사업 비전 키워드는 ‘Boundless(경계 없는)’였다. 소비자와 아티스트 상당수가 여성인 산업의 대표주자 회사가 ‘남성천하’라는 사실은 말 그대로 웃펐다(웃기고 슬펐다).

그 남성천하에서 민희진이 풀어놓은 경험들은 어땠나. 기사를 두고 차를 끌지도, 술을 마시지도, 골프를 치지도 않았다. 뭐 같이 일했고, 법인카드로 배달 음식을 먹으며 야근했다. 신드롬을 일으키며 최고 실적을 달성해 인센티브를 받았으나 마이너스 실적을 달성한 임원에게도 인센티브는 돌아갔으며, 남성 대표로부터 “즐거우세요, 즐거우시냐고요”라며 질투 섞인 조롱을 받았다.

기자회견을 보며 손뼉이나 가슴을 친 것은, 민희진과 직종도 업무도 심지어 소득도(!) 다르지만 남성 가부장 세상에서 여성 직장인으로 경험한 바가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다. 능력 있어야 하지만 겸손해야 한다. 잘해야 하지만 남성들을 위협할 만큼 잘해서는 안 된다. 무시당해도 불평해서는 안 된다. 많이 벌어와야 하지만 돈을 들먹이면 안 된다. 이런 모순들로 매일을 엮어온 사람에게 진중함, 논리정연함, 이성적이고 정돈된 모습을 기대하는 게 더 이상하지 않은가. 이런 우아한 것들은 약자가 아닌 자, 져 본 적 없는 자만이 향유할 수 있다.

그간 미디어는 여성 집단을 공적 발화자가 될 수 없는, 서로를 적으로 삼아 기싸움 하는, 어려움을 마주치면 ‘아몰랑’을 외치며 회피하는, 현실성이라고는 요만큼도 없는 모습으로 희화화했다. 얼른 몰려와 돌을 던지라면서. 민희진의 말과 눈물은 사회가 만든 여성 직장인에 관한 프레임에 반기를 들고 재점유했다. 민희진은 울고 욕하면서 남성 중심 조직에 날카로운 비판을 던지며 현 사태와 자기 입장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풍부하게 설명했다. 아티스트를 향한 애정과 염려도 아낌없이 드러냈다. 결코 충족할 수 없는 잣대를 들이미는 세상에, 그 잣대를 휘두르며 커다란 한 방을 먹인 것이다. 여성 직장인들은 이 장면을 상상했고, 바로 이런 모습이 필요했다.

여성은 감정적이고 논리적이지 않다? 술과 골프 없이는 일 못 하고, 동료의 능력과 성과를 조롱하거나 무시하고, 뒤에서 수근거리고, 트집을 잡아 깎아내리려는 것이야말로 진정 비이성, 비논리적 행태다. 터무니없는 말들 때문에 여성들은 그동안 자신을 의심하며 너무 많이, 오래 참았다. 아니라고? “맞다이”로 들어오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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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모두의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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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시운 공인노무사(퀴어동네 부대표)

“가족과 함께 살려면 나를 완전히 버려야 해” 나는 생생히 기억한다. 분노와 서러움에 치를 떨던 친구의 목소리를. 동성애인이 있다는 걸 부모님께 들킨 친구는 끔찍한 언어폭력에 시달렸고, 본가에 사는 조건으로 이성애자로 살 것을 맹세하는 ‘이성애 각서’를 종용받았다. 경제적 독립이 어려웠던 친구는 그 각서에 사인한 뒤 모멸감에 몇 달을 끙끙 앓았다. 홍석천은 되는데, 내 자식이 성소수자로 살면 안 되는 주요 골자는 혐오의 손가락질에 상처받을 자식의 삶이, 혼자 외롭게 고립되어 죽을 자식의 노후가 걱정돼서였다.

이런 걱정은 친구 부모님이 발 딛고 있는 세계로 한정하면 일면 타당하다. 그들은 똑같이 사람으로 살아 숨 쉬는 성소수자의 생생한 삶을 옆자리에서 목격한 적이 없다. 그들이 자식의 삶을 조금이라도 이해해 보려고 인터넷 검색을 하면 자극적인 거짓 혐오 글이 판을 치고, 성소수자의 존재를 찬반 대상으로 격하하는 양비론이 유력 미디어에 등장한다. 그들이 지지하는 ‘나중에 정치’ 민주당은 기독교 혐오세력에 굴복하고도 부끄러움이 없다. 부모님이 그 모든 혐오를 만든 것은 아니지만, 자식의 ‘나답게 사는 삶’을 부정함으로써 혐오에 무거운 벽돌 한 장을 더 얹는 것은 아닐까. 더 나아가 성소수자가 발 딛고 있는 세계에서, 성소수자의 삶은 부모님의 걱정대로 정말 불행하기만 할까.

혈연 가족 안에서 내 편을 찾지 못한 성소수자들은 원가족 울타리 밖에서 ‘나답게 사는 삶’을 만들고자 저마다의 방식으로 조용히 투쟁한다. 법적 인정은 받지 못해도 결혼식을 올리거나, 외국에 가서 혼인신고를 하기도 한다. 「언니, 나랑 결혼할래요?」의 저자 김규진 씨는 동성결혼으로 회사에서 경조휴가를 받고, 동사무소에 혼인신고를 접수했다.(원래 접수도 안 되었지만, 이제 접수 이후 불수리 통지한다.)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사실혼 관계로 오래오래 동거하는 커플도 많다. 혹은 유성애적인 연인 관계가 아니더라도 친구들과 커뮤니티를 꾸리기도, 반려동물과 함께 살아가기도 한다. 이렇게 성소수자들은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에 포섭되지 않는 대안가족을 이미 각자의 사적인 삶에서 만들어가고 있다.

그러나 사적 영역에만 방치된 대안가족 구성원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절반 정도만 행복하고, 절반 정도 불행하다. 행정·교육·보건의료·주거·노동 등 삶을 영위하는 데 필수적인 영역들은 법 제도가 승인한 가족 관계만을 중심에 놓고 운영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가족 개념을 이성애적 결합에 국한해 협소하게 규정해 대안적인 가족 관계는 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 없다. 물론 국가인증마크가 붙어야만 당사자가 행복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더 넓은 가족 형태가 법 제도로 보장된다면, 우리는 본인에게 자연스럽고 행복을 주는 다양한 관계들을 더욱 적극적으로 탐색하고, 인생을 계획할 수 있다.

꼭 성소수자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혼인과 혈연을 넘어서는 가족 구성의 보장에 대해 사람들은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여성가족부가 2020년 성인 1천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69.7%가 “혼인, 혈연이 아니어도 주거와 생계를 공유한다면 가족이라 여길 수 있다”고 답했고, 70.5%가 “사실혼, 비혼 동거 등 법률혼 이외 혼인에 대한 차별 폐지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삶의 형태가 다양해지고 있는데, 법 제도가 너무 늦어 사회 분위기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이미 아시아 국가 중 대만, 네팔, 태국(예정)에서 동성혼이 법제화됐다. 일본 역시 총인구의 84%에 해당하는 지방자치단체에서 동성파트너십 제도가 마련되고, 여러 혼인평등 소송이 진행되고 있을 정도로 논의가 진전됐다.

한국에서도 구시대적인 이성애 중심의 가족 범위를 넘어서는 입법이 필요하다. 실제로 21대 국회에서는 동성혼 법제화(민법 개정안), 생활동반자법, 비혼출산법 등 ‘가족구성권 3법’이 발의되었다. 그러나 민주당의 동의 없이 법안은 통과되기 어렵다. 22대 국회에서도 마찬가지다. 모든 사회 진보에는 기존 체제를 수호하는 반대 여론이 있기 마련인데, 진보의 방향에 동의한다면 그 반대를 설득하고 넘어서는 것이 정치 집단의 몫이다. 민주당은 ‘사회적 합의’라는 비겁한 방패 뒤에 숨지 말고 적극적인 입법 과정을 통해 그 합의를 만드는 주체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나 시민은 국회만 쳐다보고 있을 수 없다. 각자 서 있는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그저 살아내야 한다. 삶은 투쟁이다. 본인을 긍정하고, 사랑을 나누고, 싸우고, 울고, 산책하고, 춤추고, 술 마시고, 노동하면서 서로 버팀목이 되어주는 것. 진짜 ‘가족’이라면 사회의 혐오에 굳이 벽돌 한 장 얹지 않고 따뜻한 포옹으로 삶을 있는 그대로 안아주는 것. 그리고 필요를 느낀다면 친구나 동료에게 존재를 숨기지 않고, 옆에 이런 삶도 똑같이 살아가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 일터와 삶터에서 원하는 것이 있다면 내 편을 하나씩 만들어 함께 당당히 요구하는 것. 우리가 뭉치면 못 할 것이 없다는 자신감을 가지는 것. 정치와 법 제도가 바위처럼 움직이지 않아도 냉소는 잠깐만 하고, 무력함과 체념을 넘어서는 더 큰 파도로 움직이는 것. 집채만 한 파도는 바위를 우리가 원하는 곳으로 움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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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질병에 대한 편견과 혐오를 벗어던질 때

칼럼

▲ 한울 공인노무사(퀴어노동법률지원네트워크)

2020년 8월 한 노동자가 기계에 엄지손가락이 말려 들어가 절단 사고를 당했다. 그는 접합 수술을 위해 병원을 찾았지만 스무 번 넘게 치료를 거절당했다. 약 13시간 만에 그는 한 개인병원에서 수술할 수 있었지만, 엄지손가락의 기능을 상당 부분 상실했다.1) 그는 HIV 감염인이었다.

노동자가 건강을 지키는 데에는 혼자 노력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일하다 다치지 않기 위해 주의를 기울여도 업무량과 속도에 의해 사고는 발생할 수 있으며, 아프기 전에 쉬려고 해도 아파도 마음대로 못 쉬는 게 현실이다. 그렇기에 산업안전보건법은 사업주의 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누군가에게 고용돼 종속적인 노동을 제공하는 자의 건강은 그를 고용한 주체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사업주가 의무를 다하지 않아서, 또는 의무를 다했더라도 업무상 사고나 질병은 발생할 수 있으며, 이때 국가는 노동자에게 적절한 치료와 노동력 상실에 대한 보상을 제공한다. 한 노동자의 건강은 공동체가 함께 지키는 것이다. 그 공동체가 차별과 혐오로 오염돼있다면, 구성원 그 누구도 온전히 건강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질병을 둘러싼 은유들은 어떤 질병에 낙인을 찍으며, 좀 더 나아가서는 질병을 앓는 사람들에게 낙인을 찍어 놓는다.” – <은유로서의 질병> 수전 손택 지음

수전 손택은 질병이 단순히 아픈 증상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어떤 질병은 질병을 앓고 있는 환자에게 수치심을 불러일으켜 오히려 질병을 치료하는 데 악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그는 ‘에이즈’를 예로 들면서 ‘감염병’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사회에서 재구성되는지, 그리고 감염병을 지닌 몸을 어떻게 대하는지 설명한다. 감염병은 국가적 차원에서 무찔러야 하는 적으로 여겨지고, 보균자의 몸은 전투가 벌어지는 전쟁터로 여겨진다. 동시에 질병의 보균자는 타인에게 전파할 가능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잠정적 가해자로 여겨져 사회로부터 격리된다. 그 과정에 감염인의 인격은 제거되고, 종종 모두를 위험에 빠트린 ‘빌런’처럼 취급되기도 한다. 코로나19 초반에 슈퍼전파자, 이태원, 종교단체 집단감염자 등 특정 감염인들을 비난하고 공격했던 것과 유사하다. 그러나 감염병은 혼자 있으면 발생할 수 없다. 사회에서만, 즉 우리가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 질병의 형태가 감염이다. 그런 감염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고, 그를 격리한다고 치료되거나 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감염병에는 ‘징벌’ ‘죽음’ 등 추가적인 은유들이 더 붙기도 하는데, 대표적인 질병이 HIV 감염이다. 질병관리청의 자료에 따르면 2021년 보건당국에 HIV 감염이 확인된 내국인의 95.5%가 치료제를 복용하고 있으며, 이들 중 96.0%는 바이러스가 억제된 상태다. 즉, HIV의 전파성은 상당 부분 통제되고 있고, 질병관리청은 HIV 감염을 이제 고혈압이나 당뇨병 같은 만성질환과 다를 바 없다고 밝히기도 했다. HIV를 가진 채 건강한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HIV는 종종 죽음을 연상시키고, 감염인의 삶은 지워진다. 충분히 건강한 HIV 감염인을 아프게 한 것은 그의 감염 사실이 아니라, 질병에 덧씌워진 편견과 혐오이다.

WHO가 코로나 팬데믹 종식을 선언한 지 1년이 돼 간다. 우리는 대부분 누군가에 의해 감염당했고, 누군가를 감염시키기도 했다. 코로나 19바이러스는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 기존의 감염병에 대한 은유를 사용하면 우리는 적과 함께 사는 방법을 찾은 것이다. 감염병을 적으로 여기고 절멸시키는 전략으로는 감염병을 막아낼 수 없다. 사람이 없어져야 바이러스도 절멸할 테니 말이다. 감염병을 적으로 여기지 않고, 보균자를 전쟁터로 여기지 않아야 한다. 감염의 전제조건은 ‘우리’이고, 우리의 전제조건은 ‘서로’다. 서로가 있기에 우리는 감염할 것이고, 감염될 것이다. 편견과 혐오를 벗고, 감염병을 마주할 때 비로소 우리는 서로를 살릴 것이다.

퀴어노동법률지원네트워크 (qqdong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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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휘말린 날들>에서 인용

칼럼

언제쯤 성소수자 국회의원을 볼 수 있을까

칼럼

▲ 여수진 (퀴어동네 대표, 공인노무사)

선거에서 성소수자는 어떤 존재일까. 성소수자도 국민의 한 사람이기에 소중한 한 표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 각양각색의 공보물을 펼쳐놓고 누구에게 한 표를 행사해야 삶이 나아질지 고민하는 것도 다를 바가 없다. 쉴 새 없이 들려오는 총선 뉴스 속에서 눈길을 끌 만한 소식이 있었다. 집회에서 자주 보던 군 인권활동가가 더불어민주연합의 국민추천 비례대표 후보가 됐고, 국민투표에서 1위를 했다는 소식이었다. 그러나 “동성애자 국회의원 나오나”라는 보수·개신교 신문의 득달같은 보도와 극우 개신교의 강력한 반발이 이어졌고, 당 차원에서 그를 컷오프(공천 배제)했다는 소식이 연달아 들려왔다. 선거 뉴스를 보는 심장박동 수가 갑자기 올라갔다. 양심적 병역거부 활동을 ‘병역기피’라고 하는 컷오프 핑계는 궁색하고 모욕적이었다. 당 관계자의 입에서 “종교계에서 반발이 거셌다”는 설명이 흘러나왔다. 그가 성소수자라서 문제가 된 것이 자명해 보였다.

선거 국면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모욕은 익숙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다. 강렬했던 최근 기억은 2017년 대통령 후보 토론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촛불로 전 대통령을 탄핵하고 국민 저마다의 정치적 효능감이 하늘을 찔렀던 그때, 퀴어 친구들과 맥주 캔을 들고 단톡방에서 대화를 나누며 토론회를 봤다. 그때 인권변호사 출신인 유력 대선후보 문재인 입에서 ‘(동성애를)반대하죠’ ‘동성애 합법화는 반대합니다’라는 말이 나왔다. 멀쩡히 살아있는 존재들이 TV를 보며 맥주를 마시다가 부인당하고 불법이 됐다. 단톡방이 갑자기 얼어붙었다. 광화문에서 적폐 청산을 외친 수많은 깃발 중에 무지개도 꽤 지분이 있었건만 새로운 나라에 성소수자들은 시민으로 초대받지 못했다. 말은 칼이었고 여럿이 깊게 베였다.

성소수자가 벽장을 나와 공론장이나 공적 영역에 등장하는 것을 사회는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축제의 광장은 매년 쉽게 열린 적이 없고, 군대가 변희수에게, 숙명여대가 트랜스젠더 신입생에게, 감리교가 성소수자를 축복한 목사에게 한 일을 우리는 보았다. 보이는 족족 망치로 때려 땅 위로 올라오지 못하게 막아야 하는 두더지 게임처럼, 유독 성소수자는 사적영역에만 머물 것을, 보이지 않을 것을 강요당한다. 젠더에 따른 정체성을 지우지 않으면 사회에 머무를 자격을 얻을 수 없는 것. 이것을 차별이라 부른다. 그래서 “차별에 반대하지만, 주변에 성소수자가 없었으면 좋겠다”라거나 “차별은 반대지만 동성결혼은 시기상조”라는 말은 ‘뜨거운 아이스아메리카노’와 같이 모순이다.

민주시민이라면 커밍아웃한 성소수자가 내 가족, 직장동료, 이웃, 며느리(혹은 사위라고 불러도 괜찮다), 내 아이의 선생님, 국회의원이나 대통령, 누구라도 될 수 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 시대에 필요한 민주주의 정신은 지배층 가부장 남성만 사람으로 대접받았던 신분제를 타파하고 여성, 노동자, 어린이, 장애인, 이주민 등 다양한 존재들이 자기 모습 그대로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게 된 것에 있다고 믿는다.

그럼에도 여전히 21대 국회를 사람으로 표현하면 ‘55세 SKY대학을 나온 남성’이라고 한다. 선거철마다 후보들이 빨강, 파랑, 노랑, 녹색 등 다양한 색 옷을 입고 춤추는 것을 보면 퀴어퍼레이드라도 온 것 같은 착시가 생기지만 뽑고 나면 결국 또 50·60대 특권층의 가부장 남성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은 변한 적이 없다. 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의식이 성소수자를 시민으로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낙후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소수의 특권층 가부장이 모여 누가 시민이 되고 누가 시민이 될 수 없는지 판단하고 극우 교회집단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작금의 상황이 문제다.

국민투표 1위를 하고도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반대를 당하고 자격이 취소될 수 있는 세상이라면, 개개인의 공적 공간인 일터에서 성소수자 국민의 자리는 어떻게 지켜질 수 있을까. 성소수자인 채로는 비국민으로 살아야 하는가. 22대 국회 임기 중인 2027년이면 차별금지법이 처음 발의된 지 20년이 된다. 부디 새로운 국회는 그동안 평등에 대한 책무를 방기한 것을 반성하고 차별금지법 제정으로 그 빚을 갚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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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은 화장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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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진 공인노무사 (퀴어동네 운영위원)

“차별이 뭘까요?” 지난해 퀴어동네는 ‘퀴어 노동자를 위한 노동법’이라는 주제로 여기저기서 교육을 진행했다. 교육 중간중간 참가자들에게 경험과 생각을 물었는데, 그중 하나의 질문이었다. 누가 노무사 아니랄까 봐 ‘같은 것을 다르게, 다른 것을 같게’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와중, 한 참가자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차별은 화장실이예요.”

태어났을 때 지정된 성별과 다른 성정체성을 가진 트랜스젠더에게 화장실은 집 밖으로 나오기만 하면 피할 수 없는 중대한 문제가 된다. ‘공중화장실 등에 관한 법률’은 일정 규모 이상의 공중화장실은 남녀를 구분해 설치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삶의 필수 장소지만 성별 이분법 그 자체인 공간 앞에서 트랜스젠더는 고민할 수밖에 없고, 이 문제는 자신이 정체화하는 성별로 ‘완벽하게 보이지 않는’ 경우 더욱 커진다.

국가인권위원회가 2021년 발표한 ‘트랜스젠더 혐오차별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조사에 응한 트랜스젠더 당사자 589명 중 40.9%가 남녀 성별이 분리된 공중화장실을 이용할 때 부당한 대우나 불쾌한 시선이 두려워 자신의 정체성과 다른 성별의 시설을 이용한다고 응답했다. 화장실에 가는 것을 피하려 음료를 마시거나 음식을 먹지 않은 경우도 39.2%나 달했다. 거리가 멀어도 남녀공용이나 장애인 화장실 등을 이용했던 경우(37.2%), 아예 화장실 이용을 포기한 경우(36.0%)도 상당했다. 화장실 문제는 직장에서도 심각하게 발생한다. 트랜스젠더 노동자 156명에게 정체성과 관련해 현재 직장에서 경험한 부당한 대우나 어려움에 대해 물었더니, ‘직장 내 화장실, 탈의실, 휴게소, 헬스장 등을 이용할 때 겪는 어려움’(26.9%)을 1위로 꼽았다.

현재의 성별 이분법적 화장실은 트랜스젠더만의 문제는 아니다. 트랜스젠더 ‘남성’이나 트랜스젠더 ‘여성’이 아닌 논바이너리(성별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남성’과 ‘여성’에 국한하지 않고 자신의 성별 정체성을 정체화하는 사람)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물론이고, 겉모습이 ‘여성답지 않은’ 시스젠더(성별 정체성이 자신의 지정 성별과 일치하는 사람) 여성이나 ‘남성답지 않은’ 시스젠더 남성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자신의 정체성을 매번 애써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최근 가장 크게 이슈였던 것은 2022년 성공회대에서 국내 대학 중 최초로 설치한 ‘모두의 화장실’이다. 성별 이분법적 구분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성중립 화장실’보다 더 확대된 개념의 공간으로, 트랜스젠더 등 성소수자를 비롯해 휠체어 장애인, 성별이 다른 활동지원사와 활동하는 장애인, 생리컵을 쓰는 여성, 보호자가 필요한 어린이와 어르신 등 평소 화장실 이용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모두 편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설치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한 시민단체의 민원에 의해 폐쇄될 위험에 처했지만, 지난 2월 다행히도 존치 결정이 내려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성공회대에 이어 KAIST와 서울대에도 ‘모두의 화장실’ 바람이 불고 있다.

대학 다음은 단연 직장이다. 학생들이 직장인이 되고 나서도, 차별받지 않고 혐오와 폭력에 대한 걱정 없이 마음 편히 사용할 수 있는 화장실이 필요하다. 물론 쉽지는 않을 것이다. 성공회대에서 ‘모두의 화장실’을 만들고자 한 학생들도 ‘그게 필요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되냐, 그 몇 사람을 위해 그만한 비용을 쓰는 게 가치 있는 일인지 증명해 보라’는 말을 수없이 마주하며 무려 5년 만에 설치에 성공했다. 직장에서의 변화를 꿈꾸는 사람들도 같은 질문을 마주하겠지만, 돈보다 노동권이, 오줌권이, 생존권이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함께한다면 변화는 오지 않을까. ‘모두의 화장실’을 위한 논의가 더욱 널리 퍼지기를 기대한다.

퀴어노동법률지원네트워크 (qqdong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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