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마음에 다정함이 깃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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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리 퀴어동네 운영위원

전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했던 때, 프리랜서 요가강사로 여의도에서 새벽 수업을 하고 있었다. 계엄령이 해제되고 3시간 뒤, 국회가 내려다보이는 건물로 출근했다. 보통 수업을 마치고 퇴근하는 시간은 오전 8시 반, 그러니깐 직장인 평균 출근 시간이 내겐 퇴근 시간이었다. 새벽 수업을 하는 내내 여의도역 긴 레일을 혼자만 반대로 걸었다. 그 감각은 도통 익숙해지지 않았고, 계엄령이 있었던 날은 유독 이상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이곳에서 계엄령을 해제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런데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사람들이 출근을 한다는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여의도에는 금융권 회사가 많았고, 아마도 지금 출근하는 사람 중 많은 수가 금융업계에 종사하고 있을 것이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우리는 출근을 할까?’라는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 ‘자본’이 정상적으로 흘러가기 위해 계엄령이 선포된 날조차도 이렇게 많은 사람이 일하러 나왔다는 게, ‘자본주의’를 유지하기 위해 이토록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다는 게 새삼스레 놀라웠다.

만약에 사람들이 ‘자본주의’를 위해 일하는 게 아니라 ‘다정함’을 위해 일한다면 어떨까. ‘다정함’을 생산하고, 널리 유통하고, 파생되는 소소한 가치까지 활용한다면 어떨까. 돈이 많은 사람을 우러러보는 게 아니라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을 존경하는 세상이면 어떨까. 그렇게 된다면 아주 조금은 세상이 살만해질 것 같았다. 더 말랑말랑하고 폭신폭신한, 그러니까 모두가 살 수 있는 그런 세상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집단 내 타인이라는 개념이 생기면서 우리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이들까지도 사랑하게 됐다. 이 확장된 가족 개념은 과거 우리 종의 성공에 이바지했으며, 미래도 아주 희망적이다. 인구가 증가할수록 그리고 더 많은 자원을 써야할수록, 우리 종이 지속적으로 번영하기 위해서는 신뢰의 범위를 지속적으로 넓혀가야 한다.” – 브라이언 베어, 버네사 우즈,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브라이언과 버네사는 다른 사람 종이 멸종하는 와중에 우리 종이 살아남아 번성한 이유를 다정함으로 설명한다. 우리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에게도 나와 같은 인간(집단 내 타인)이라는 감각을 느끼며, 그로부터 공감과 연민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 동시에 우리는 나와 다른 인간, 특히 나 또는 내가 아끼는 무리에게 위협이 될 것 같은 집단에 대해선 한없이 잔인해질 수도 있다. 타인에게 공감이 일어나던 뇌신경작용을 스위치 끄듯이 꺼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얼마나 다정한지, 동시에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는 책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힘든 일을 겪은 친구를 위로하고, 길 가다 넘어진 사람에게 괜찮은지 묻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런데 친구가 겪은 일이 나로 인한 일일 때, 길 가다 넘어진 사람이 술에 취한 노숙자일 때처럼 나에게 해를 가하거나 나와 다르다고 느껴지면 그 위로와 친절은 어려워진다. 자본주의는 우리를 구별하고, 차별하며, 타인에 비해 내가 얼마나 특별한지를 증명하도록 강요한다. 누구든지, 언제라도 나를 공격할 수도 있다는 감각을 심어주고 끊임없이 타인을 의심하게 한다. 공감과 연민의 대상을 좁히고, 공감과 연민이 작용하는 신경회로의 스위치를 차단하려고 한다. 서로에게 다정해지기보다는 잔인해지게 한다. 그런데 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는 팔레스타인의 해방을 위해 함께 투쟁할 수 있으며, 공장에서 태어나 죽음을 맞이하는 비인간동물을 위해 고기를 먹지 않는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우리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존재들을 위해 시간과 마음을 쓸 수 있다. 우리는 기꺼이 서로의 앨라이가 될 수 있다. 그러니깐 자본주의가 우리의 속성을 바꾸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잔인함이 우리의 전부가 되지는 않는다.

12월 31일이다. 한 해를 돌아보고 내년을 준비하기 적당한 때이다. 마음 안에 다정함을 심는다. 차별적인 발언을 들었을 때, 억울한 죽음을 보았을 때,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잔인함을 맞닥뜨렸을 때, 다시 돌아올 곳으로 다정함을 두었다. 이 글을 읽는 모두의 마음에도 다정함이 깃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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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결혼휴가를 거부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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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수진 공인노무사(퀴어동네 운영위원)

어떤 공공기관 인사팀에 한 직원의 결혼휴가 신청서가 올라왔다. 여느 신청서와 같이 청첩장이 첨부돼 있었다. 보통은 청첩장이 확인되면 결혼휴가가 승인되고, 이외에 다른 조건이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이번엔 쉽게 결재할 수 없었다. 직원의 배우자가 해당 직원과 같은 성별이었기 때문이다. 당신이 인사담당자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최근 실제로 상담했던 사례다. 인사담당자는 결국 이 결혼휴가 신청을 거부했다. ‘민법이 인정하는 결혼’이 아니라는 이유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사안의 핵심은 ‘동성결혼을 인정해야 하는가’가 아니다. 정확히는 결혼휴가 부여 기준을 특정 노동자에게만 달리 적용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이 직원은 특별한 혜택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다른 직원과 똑같이 청첩장을 제출했고, 취업규칙에 따라 휴가를 부여해 달라고 했을 뿐이다. 이 기관은 그간 결혼의 ‘법적 성립’ 여부를 따지지 않고 결혼휴가를 부여해 왔다. 혼인신고를 나중에 하거나 살림을 합치지 않았거나, 기타 여러 사정이 있는 경우에도 결혼식과 청첩장이라는 사회적 약속과 사실관계만으로 휴가를 승인했다. 그런데 유독 이 결혼에만 ‘민법상 결혼’이라는 요건을 새롭게 두어 이 직원을 휴가제도에서 배제하는 차별을 한 것이다.

제도 취지의 관점에서도 이 선택은 옳지 않다. 기업의 결혼휴가 제도는 민법이 혼인제도를 보장하는 것과 취지가 다르다. 직원이 삶과 일을 잘 조화시켜 나갈 수 있도록 돕고, 배우자와 결합이라는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을 안정적으로 준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한 사람이 평생의 동반자를 선택하고 그 관계를 사회 앞에서 선언하는 순간을 존중하겠다는 메시지다. 그 취지에서 본다면 이 결혼에 대해 휴가를 주는 것은 제도의 목적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다.

대법원도 민법상 동성 혼인이 가능하지 않더라도 국가의 사회복지제도가 이들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동성부부 역시 지속적인 공동생활과 상호부양을 전제로 한 ‘실질적인 생활공동체’이며, 이를 제도에서 배제하는 것은 합리적 이유 없는 차별이라고 하면서 동성 배우자의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했다. 기업이 법원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인사담당자로서의 고충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시대 변화를 불편해하는 임원의 시선, 혹은 ‘괜히 논란의 중심에 서고 싶지 않다’는 우려가 앞설 수 있다. 그러나 평범한 대기업 노동자 김규진씨가 동성 파트너와 결혼하면서 다른 노동자들과 똑같이 청첩장을 제출하고 결혼휴가를 인정받아 뉴스에 보도된 것이 벌써 5년 전이다. 그 사이 이 부부는 슬하에 1녀를 둔 3인 가족이 됐고, 여전히 회사에 재직 중이다.

동성부부에게 휴가를 부여한다고 해서 기업에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예산이 드는 것도 아니고, 다른 노동자의 권리가 침해되는 것도 아니다. 배우자를 선택하는 데 아마도 남들보다 조금 더 용기가 필요했을 직원이 지지와 축복 속에서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게 될 뿐이다.

반면 동성 배우자와의 결혼휴가에 대한 차별은 결혼휴가 부여에 관한 취업규칙 위반이고, 이 직원이 다른 성별이었다면 결혼휴가가 승인됐을 것이기에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남녀고용평등법)에서 금지하는 성차별에 해당할 소지가 있다. 또 “인종, 종교, 장애, 성별, 연령, 출생지, 정치적 견해 등에 따른 일체의 불합리한 차별을 금지하며 다양성을 존중한다”고 규정한 해당 기관의 윤리경영헌장과 ESG 평가 기준을 정면으로 무시하는 결정이다. 어떤 것이 ‘리스크’가 더 클까.

“신청하신 휴가가 승인되었습니다. 결혼을 축하합니다.”

직원의 삶의 새 출발 앞에서 이 한마디를 건네는 일이 정말로 그렇게 어려운 선택일까. 그러한 일을 겪는 동료를 보고 다른 노동자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결혼휴가를 둘러싼 이 사례는 노동자 삶의 형태가 다양해진 사회에서 인사담당자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 인사담당자라면, 이 결혼휴가를 정말로 거부하시겠습니까?

퀴어노동법률지원네트워크(qqdong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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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에서 퀴어로 살아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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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지(퀴어노동법률지원네트워크 운영위원)

나는 얼마 전까지 대기업(X사)에 다녔던 30대 동성애자다. 퀴어로서, 사회비판적 의식을 가진 사람으로서 기업문화에 완전히 녹아드는 것은 예상대로 쉽지 않았다.

대기업은 사회가 규정한 ‘정상’ 루트를 착실하게 밟아온 사람들이 모인 곳이고, 규범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멸균처리된 공간이다. 그렇기에 시스젠더·이성애자 중심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고, 결혼과 임신·출산·육아는 자연스럽게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된다. 물론 한국 사회의 많은 곳에서 그러한 분위기가 여전히 공고하다. 그럼에도 X사에서의 많은 관계와 대화들은 자본주의적 욕망과 맞물려 부부관계, 시월드, 자녀교육, 모부성보호제도의 전략적 사용 등 결혼과 정상 가족에 더더욱 편중되는 경향이 있었다.

좋은 동반자를 만나서 남부럽지 않은 화목한 가정을 꾸리는 것. 적당한 집, 적당한 차, 적당한 자녀교육 등을 구매할 중산층으로서의 여력. 이를 가능하게 하는 안정적 고정 수입과 재테크, 은행·사내 대출. 적어도 이러한 목표들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야 지루하고 고된 회사 생활을 버틸 수 있다. 그 세계에 발 딛고 서 있는 사람들에게 결혼하지 않는 것은 상당히 비합리적이다. 대체로 ‘사람 좋은’ 구성원들이 많았지만, 그렇기에 남에게 관심이 많고 챙겨주려는 마음에서 내게도 여러 질문이 쏟아졌고, 답은 항상 비슷했다.

“여자친구 있어?” “만나는 분이 있습니다.” (애인을 투명 인간 취급하고 싶지 않았다)

“결혼은 언제 할 거야?” “둘 다 일 욕심이 많아서 늦게 할 생각입니다.”

“남자도 어릴 때 낳아야 육아가 편하니깐 결혼은 무조건 빨리해야 해.” “네.” (그러니까 모두의 결혼 후원해 주세요)

‘연결과 단절 사이’ 퀴어 직장인의 일상적 스트레스

문제는 나 역시 좋은 동료들과 진솔한 관계를 맺고, 연결되고 싶은 사람이라는 점이다. 연결은 서로의 삶에 한 발짝씩 다가가는 것인데, 내게 ‘사랑과 연애’는 삶에서 중요한 부분이고, 이를 숨긴 채 온전히 이해하고 이해받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는 비단 내가 다녔던 기업에서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혹시나 애인의 사진을 보여달라고 한다면? 성별을 바꿔 말하다가 실수로 거짓말이 들통난다면? 그래서 많은 퀴어들은 애초에 본인의 사적 이야기를 아예 오픈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거짓말로 점철된 일상을 살아가게 된다. 내가 만났던 다른 회사의 게이들은 동료들이 소개팅을 시켜줄 때, 관계가 틀어지거나 의심받을까봐 억지로 소개팅에 나가는 경우들이 종종 있었다. 이처럼 나를 철저히 숨겨야만 하는 공간에서 나날을 버텨가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극소수의 친한 동료들에게는 커밍아웃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극히 개별적인 관계에서만 공유될 뿐, 나를 구성하는 요소로서 공개적으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X사는 구성원 간 융화와 네트워킹을 중시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연애·결혼·가족관계는 사적 정보임에도, 그 사람을 이해하는 핵심 요소로 작용한다. ‘칼퇴’와 회식 불참에 대한 양해부터 커리어와 삶의 기반에 대한 진지한 논의까지 고려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애인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더라도, 오픈되지 않으면 철저히 사적 영역에 갇힐 수밖에 없다.

이를 넘어서려는 시도로 존경하던 팀장님께 퇴사면담을 하며 용기 내 커밍아웃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정색하며 “너의 정체성은 존중하지만, 여기는 그런 것이 수용되는 공간이 아니니깐 조심하는 것이 좋겠어”라고 답했다. 나를 걱정하는 조언이라는 것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내 삶의 중요한 요소로서 나의 사랑이 공적 차원에서 존중받지 못하는 감각은 사회에서는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인데도 여전히 익숙하지 않고 아팠다.

이러한 분위기에서는 동성 파트너에 대해 사내복지제도를 신청하기 당연히 쉽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나는 당시 애인이 있었으니 만약 미래를 약속하고 결혼(일반적으로 혼인신고·동거·결혼식을 통칭하나 동성관계의 경우 동거와 결혼식)이라도 하게 된다면 이왕 대기업을 다니는 김에 ‘뽕 뽑기’의 일환으로 여러 제도에 도전하고 선례를 남겨보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물론 경조휴가, 수당, 가족건강검진, 자녀 학자금 지원 등과 같은 사내복지제도는 정상가족을 중심으로 설계돼 있기는 하다. 하지만 X사의 ‘본인 결혼식 휴가’를 예로 들자면 부여 요건으로 그저 청첩장을 요구할 뿐, 명백하게 ‘법률혼’으로 한정하지 않았었다. 최근 이성애자 부부들도 여러 이유로 혼인신고를 하지 않는 케이스가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규정대로만 해석한다면 동성커플도 결혼식을 할 때 해당 제도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내가 만약 이걸 신청한다면? 일단 담당자는 물론이고 상급자들은 내가 퀴어라는 것을 모두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은 논의 과정에서 “떼쓴다고 해주면 계속 더 달라고 한다” 혹은 “네가 감히 소동을 만들어?”와 같은 부정적 평판을 공유할 것이다. 이를 극복하고 결국 휴가와 수당을 받아내더라도 일주일간 결혼휴가를 즐기러 가는데, 동료들을 결혼식에 초대하지 않을 수 있을까? 설사 초대한다고 한들 그들이 과연 결혼식에 올까? 고작 돈 몇 푼과 휴가 며칠로 회사 생활을 위기에 빠뜨리는 것을 감수할 용감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서로의 ‘용기’로 ‘연대’를 만들기

3년간 퀴어동네 활동을 하며, 퀴어 직장인의 정신건강 저해 요소, 직장내 커밍아웃과 투쟁의 필요성을 배웠다. 그러나 정작 자본주의 이윤논리가 극대화된 사기업에 들어가 보니, 그러한 깨달음과 별개로 일단 내 자리를 지키는 것부터 수없는 위기의 연속이었다. 회사와 종속적인 관계에서 먹고사니즘, 나를 둘러싼 현실적 고민들이 많은 것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주변 동료들의 여론, 빡빡한 근태관리, 쏟아지는 업무들의 촉박한 납기일, 상사의 심기 경호, 이를 수행하지 못하면 가해지는 압박 분위기, 평가와 성과급 제도, 철저히 수직적인 업무상 지휘명령 관계. 내 사상이나 가치관에 부합하지 않는 일이 벌어져도, 파편화된 개인은 자기합리화하고 침묵해야 조직에서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

결국 이를 극복하려면 나와 함께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을 만들어야만 한다. 내가 결혼휴가를 신청할 때 지지해 줄 수 있는 동료나 상급자가 있다면? 당사자와 연대자의 모임을 조직해 사내에 깃발을 꽂는다면? 이를 시작으로 조합원으로서 노동조합에, 회사에 목소리를 관철할 수 있다면?

내 편을 만드는 것은 상대의 고민에 진지하게 응답하면서 내 삶도 공유하고, 서로의 불안감과 두려움을 덜어주며, 함께 목소리 낼 수 있는 관계를 조직하는 것이다. 비록 X사에서는 그러한 관계를 만들지 못했지만, 이 경험을 토대로 어느 직장에 있든 옆자리 동료와 서로의 용기가 돼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다짐해 본다.

퀴어노동법률지원네트워크(qqdong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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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도 무지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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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이(퀴어노동법률지원네트워크 회원)

“저기, 무지개 동지!”

얼마 전 전국노동자대회에 참여해 많은 사람들 속에 앉아 있던 중이었다. 누군가 나를 부르며 리플렛을 한 장 건넸다. “인쇄를 많이 하지 못해 일단 무지개 동지에게 드릴 테니 주위에도 전해 달라”는 말과 함께였다. 조끼에 달아놓았던 무지개 바탕에 ‘동지’라고 쓰여 있는 작은 원형 배지를 본 모양이었다. 리플렛에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성소수자특별위원회 설치 지지 연명을 요청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돌이켜보면 학교는 정말 남들과 비슷하길 요구받는 공간이었다. 다른 학생들과 똑같이 교복을 입어야 하고, 염색도 금지됐다(이건 시기와 지역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에서는 바지 교복도 허용되지 않았고(지금도 화가 나는데 ‘여학생들은 치마를 입고 조신하게 다녀야 한다’는 것이 당시 교장 교사의 주장이다), 겨울 외투도 어두운 색만 입을 수 있었다. 남들과 다를 것이 허용된다면 그건 성적뿐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에는 교사들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면 학교라는 공간은 교사들에게도 억압적인 공간이었겠다 싶다. 교사라는 직업은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이유로 어떤 직업보다 높은 도덕적 기준을 요구받고, 그 도덕성은 때때로 ‘정상성’으로 부당하게 치환될 때가 있다. 정상성에서 벗어나는 소수자성은 종종 교사의 자질이 없다는 근거로 쓰인다. 교사로 일하는 친구는 학생 지도와 관련해 양육자와 이견이 있을 때마다 “아이를 안 낳아봐서 모른다”는 이야기를 듣는다고 했다. 아이를 낳기는커녕 이성과 결혼할 생각조차 없는 그 친구는 학생들을 얼마나 아끼는지와는 상관없이 영영 ‘훌륭한 교사’가 되지 못할지도 모른다.

지난 3월 전교조 성평등특별위원회에서 성소수자 교사의 학교 경험과 관련해 시행한 조사에 따르면, 성소수자 교사의 73.6%(중복 포함)가 ‘성소수자 차별과 혐오 표현’을 접한 적이 있었다. ‘가족수당·경조사비·건강보험 등 경제적 차별’(45.1%)과 ‘가족돌봄휴가·질병휴가 사용 등 복무 차별’(40.7%)을 경험했다는 응답도 많았다.

일부 교사는 아웃팅(성소수자의 성적 지향이나 성별 정체성을 본인의 동의 없이 제3자가 폭로하는 행위)이나 성희롱 같은 폭력적인 상황을 겪기도 했다. “성소수자로 커밍아웃하지 않았기에 직접적으로 차별받은 경험은 없지만, 이성애·시스젠더(출생 성별과 성별 정체성이 일치)·정상가족을 당연하게 여기는 분위기에서 소외감과 고립감을 느꼈다”는 사람도 여럿이었다.

성소수자 교사가 안전할 수 없는 공간에서 성소수자 학생이 안전할 리 만무하다.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부산지부가 2023년 시행한 ‘부산지역 학생 성소수자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성소수자 학생들은 교사로부터 혐오 표현을 듣거나(33%), 또래 학생들로부터 “징그럽다” “피해야겠다”는 따돌림의 말(71%)을 들었다. 아웃팅·놀림·모욕·비난·폭력과 같은 부당한 일을 겪었다는 응답 비율도 39%로 높았다. 배제되지 않기 위해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교사와 친구들 사이에서 정체성을 숨기고, 자신을 혐오하는 말에 동조해야 하는 것이다.

성소수자특별위원회는 제도적으로 차별받고 있는 성소수자 조합원의 노동권을 보장하고 성소수자 친화적인 문화를 만들 것이라고 한다. 성소수자 교사가 잘 지낼 수 있는 일터는 성소수자 학생도 행복할 수 있는 공간일 것이다. 그리고 좀 더 성평등한 학교를 겪은 학생들은 나아가 사회의 다른 일터들도 더 당연하게 바꿔 나갈 수 있지 않을까. 나를 포함해 여러 공간의 무지개 동지들에게 무엇인가 해야 하고, 할 수 있다는 동기부여가 된다는 점은 말할 것도 없다. 성소수자특별위원회 설립에 나선 동지들에게 무한한 응원의 마음을 보낸다.

퀴어노동법률지원네트워크(qqdong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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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고기는 내가 살게, 무는 네가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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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세정(소순) 퀴어동네 운영위원

9월이 시작하는 날이었다. 평소 별다른 연락이 없던 집 건물주에게서 전화가 왔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내가 사는 집 위층에 불이 났고 출동한 소방관들이 우리 집 현관문을 강제로 개방하면서 문이 부서져 오늘부터 집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전화를 끊고 잠시 멍해졌다. 하던 일을 마저 끝내고 하루 묵을 숙소를 찾은 뒤 사무실을 나섰다. 그때는 몰랐다. 9월의 마지막 날까지 꼬박 한 달을, 집이 있는데도 없는 사람처럼 지내게 될 줄은.

처음 2주는 금방 집에 돌아가리라 생각하고 고정 숙소를 구하지 않고 날마다 거처를 옮겨 다녔다. 하지만 숙박업소에서만 지낼 수는 없었다. 괜찮은 곳은 비용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염치없이 친구들의 집에 하루씩 신세를 지기로 했다. 오래된 친구의 혼자 사는 집, 가족과 사는 집, 여행으로 비어있는 집, 친구의 동거인이 쓰는 작업실 등 ‘하루살이 내 집’이 여러 곳 생겼다. 집을 내어 준 사람은 제각각이었지만, “우리 집도 괜찮으면 와”라며 편히 지내라는 말을 덧붙이는 건 모두 같았다.

얼마 전 영화 <사람과 고기>를 보았다. 폐지를 줍거나 길가 좌판에서 채소를 팔며 근근이 살아가는 독거 노인 셋이 고깃집을 돌아다니며 무전취식하고 도망치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세 사람은 소고기뭇국을 끓여 나눠 먹으며 친해지는데, “소고기는 내가 살게 무는 자네가 사”라는 말에서 시작된다. 웃고 울고 감격한 장면 중에서도 유독 그 대사가 마음에 남았다. 언젠가 늙고, 힘없고, 돈 없는 나와 내 친구들이 저런 대화를 나누며 지내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2022년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가 발간한 ‘2차 성소수자 노후인식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성소수자들이 노후 생활에서 가장 큰 어려움으로 꼽은 것은 빈곤, 질병, 고독 다음으로 ‘나를 돌봐줄 사람’이었다. 나와 내 친구들 대부분은 결혼할 생각이 없거나 애초에 법적으로 혼인할 수 없다. 원가족과 살거나 새로운 가족을 꾸리는 대신 혼자 사는 경우가 많다. 일하지 않으면 생계를 유지하기 어렵고, 부모나 자신을 위한 돌봄을 대비하기도 힘들다. 살아본 적도, 배운 적도, 충분히 이야기해 본 적도 없는 우리에게 노년과 고립, 고독, 돌봄의 공백은 구체적인 두려움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서로 곁에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싶다. 하루살이 내 집에 누워 혼자인 삶과 함께인 삶을 잠시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아무 연고 없는 곳에서 하루아침에 집이 사라졌다면 어땠을까. 출근은 해야 하는데 모든 걸 던지고 고향으로 갈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면 보상을 받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적지 않은 돈을 들여 숙소를 구해야 했을 것이다. 혼자인 삶을 상상하니 고민이 꼬리를 물었다. 하지만 고민만 가득하던 상상은 ‘그래도 함께인 삶이라 오늘 이렇게 누워 있을 수 있네’ 하는 안심으로 끝났다. 집 없고, 돈 없고, 힘없어도 지금처럼 연결돼 있다면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와 영화 이야기를 하다가, 오래전 친구와 ‘할머니 페미’가 되어 오토바이를 여러 대 몰고 신촌오거리를 마비시키자고 약속했었다는 말을 들었다. 걱정은 많지만, 사실 할머니가 되면 어떻게 살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다만 언젠가 “우리 집에서 같이 밥 먹자. 소고기는 내가 살게 무는 네가 사 와”라고 말하며 모여 소고기뭇국을 끓여 먹고, 할머니 페미 오토바이 부대로 신촌오거리를 점거하며 살아갈 것 같기는 하다. 그날까지 질긴 고기도 넉넉하게 씹어 넘길 수 있게 치아 관리를 잘하고, 오토바이 점거 인원이 모자라지 않게 서로를 잘 살펴야겠다. 우리 일상과 공간을 주고받으며 같이 살고, 같이 늙자. 우리 집에 올 때는 무를 꼭 사오고.

퀴어노동법률지원네트워크(qqdong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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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부부의 사실혼 관계 인정받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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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이 퀴어동네 운영위원

2024년 7월 대법원은 동성 부부의 국민건강보험 직장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사실혼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는 국민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하면서, 동성 동반자에게만 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합리적 이유가 없는 차별이라는 판단이었다. 동성 동반자의 권리를 처음으로 인정한 역사적인 판결이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지난달 28일 건강보험공단이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배우자 피부양자 자격 취득 건수는 지난해 6건, 올해 8월 말 기준 12건 등 모두 18건으로 조사됐다. 이 가운데 현재 동성 배우자 피부양자 자격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10명에 불과하다.

판결 이후에도 직장피부양자 인원이 10명에 그친 것은 요건이 까다로운 데다 회사에 이를 알릴 수밖에 없기 때문으로 보인다. 직장가입자의 경우 인사팀이나 총무팀을 통해 피부양자 등록을 요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본인이 직접 동성 배우자를 피부양자로 등록하더라도 급여 지급을 위한 4대 보험 관리나 연말정산 과정에서 직장피부양자 신분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즉, 회사 내 공개 커밍아웃이 가능한 ‘퀴어친화적’ 조직문화가 뒷받침돼야 하지만, 한국에서 이런 문화를 가진 회사는 아직 드물다.

직장피부양자로 등록된 뒤에도 문제가 이어진다. 건보공단은 지역별로 ‘자격관리 심의위원회’를 열어 매년 피부양자 자격 취득의 적정성을 심사한다. 이 과정에서 생활공동체 관계 성립일을 명시한 공증서류, 내국인 2인의 인우보증서, 혼인관계증명서와 신분증, 동성 동반자 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객관적 증빙자료를 제출하도록 요구한다. 증빙자료는 결혼, 재산, 생활비 등 항목으로 구분돼 있으며, 하객 5명 이상의 결혼식 사진이나 청첩장, 공동명의 계좌, 부동산등기부등본 또는 임대차계약서 등을 택해 제출해야 한다.

건강보험공단이 요구하는 이런 서류는 사실혼 관계에 있는 이성 부부에게 요구되는 자료와 크게 다르지 않다. 결국 단순 동거와 사실혼 관계를 구분하는 핵심 기준은 ‘사회적 인정’이다. 그러나 많은 동성 부부가 벽장 속에 숨어 사회적 인정을 받지 못하는 현실을 고려하면, 친구나 가족 등에게 관계를 공개하지 않았을 경우 사실혼이 아닌 단순 동거로 판단될 가능성이 크다.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어려운 동성 부부는 요건을 충족하기 위해 오히려 관계의 단절이나 차별의 위험을 감수하고 커밍아웃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놓인다.

공단이 주장했던 것처럼 한 달에 수만 원 정도만 부담하면 지역가입자로서 건강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으므로 사실혼 관계를 인정받는 실익이 크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혼 관계를 인정하는 사회보험은 건강보험 외에도 국민연금, 공무원연금, 산재보험 등이 있다. 특히 국민연금의 유족연금은 생계를 같이하던 배우자가 사망할 경우 그 권리를 승계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국민연금법 3조2항은 수급권자 대상에 사실상 혼인 관계에 있는 자를 포함하고 있다. 지난 국정감사에서 보건복지부 장관이 “국민연금도 건강보험과 같은 사회보험이므로 같은 기준으로 가야 한다”고 밝힌 만큼, 동성 부부의 4대 보험 적용은 건강보험공단의 사실혼 관계 기준을 따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사실혼 관계에 있는 이성 부부에게 요구되는 서류를 동일하게 동성 부부에게 일괄 요구하기보다, 동성 부부의 관계적 특성과 현실적 여건을 고려해 사실혼 인정 기준을 완화하거나 별도의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나아가 이러한 제도 개선은 단순히 행정 절차의 정비에 그칠 것이 아니라, 커밍아웃해도 차별받지 않는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인식의 전환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현재 피부양자 자격을 유지하는 인원 수가 보여주듯, 법과 제도의 보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은 성적 지향과 관계없이 누구나 차별받지 않고 동등한 권리를 인정받는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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궤도의 밖에서, 당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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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란다 공인노무사(퀴어동네 회원)

소행성이 날아와 지구의 대부분이 박살 난다. 곳곳에 불바다가 생겨 먹구름으로 하늘이 가득 차 태양 빛이 닿지 않는 곳은 얼어붙고 지진과 해일이 덮쳐온다. 소수의 인간만이 살아남는다. 지구는 폐허가 되고 문명의 복구는 요원하다. 그런데 달에서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저기 사람이 있다. 지구는 그를 구해야 할까?

전삼혜 작가의 <궤도의 밖에서, 나의 룸메이트에게>라는 작품의 줄거리 중 일부다. 책장을 넘기며 고민했다. 달로 우주선을 보내야 할까? 수십억 명이 죽었고 살아남은 이들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고작 한 명을 위해? 지하철에서 엉뚱한 고민만 내내 하며 나는 퀴어동네 회원세미나로 향했다.

지난 토요일, 퀴어동네 주민들은 세미나를 열었다. ‘일터를 퀴어링’이라는 이름의 세미나는 두 섹션으로 진행됐다. 1섹션은 퀴어동네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가 함께 진행한 연구인 ‘성소수자 노동실태와 정신건강연구’에 대한 발제와 토론이었고, 2섹션은 누구나 노조지회 사례를 중심으로 살펴본 ‘노조운동의 퀴어링’에 대한 발제와 토론이었다.

퀴어들은 일터에서 존재가 지워진다. 그 존재가 가시화될 때 으레 따라오는 것은 차별과 혐오다. 퀴어는 불편한 존재가 되거나 무시하는 존재가 된다. 그에 관한 토론으로 ‘커밍아웃 할당제’라는 급진적인 제도가 제안되기도 했다. 모두가 뜻을 모아 “여기에 퀴어가 있다”고 소리치자고.

누구나 노조지회는 탄핵 정국 당시 광장에 나왔던 이들이 주축이 돼 만든 민주일반노조 산하 지회이다. 프리랜서, 학생, 자영업자 등 다양한 특성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발견된 공통점은 퀴어다. 광장에 빼곡하게 나부끼던 무지개 깃발을 생각하면 딱히 놀랄 일도 아니건만, 새삼스럽게 놀라고 만다.

세미나 내내 던져진 화두는 하나하나가 다 반짝였다. 각자의 일터에서 일을 하며 차곡차곡 쌓인 고민부터 노동인권을 위해 길바닥을 방바닥 삼아 지냈던 시간이 피워낸 질문은 함께 고민할 동지를 만나 폭죽처럼 팡팡 터졌다. 일단 우리의 첫 번째 임무는 일터 곳곳에 있을 퀴어를 ‘만나야 한다’라는 것이었다. 불편하든 낯설든 좋으니, 그가 그곳에 있다고 발견해야 했다.

퀴어동네 주민들의 토론을 들으며 나는 소행성이 충돌한 지구에서 살아남은 자가 된 기분이었다. 달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기꺼이 살리자고 이야기했을 이들의 목소리가 이렇지 않았을까? 사람이 있다는 걸 발견하고, 그를 하나라는 숫자로 환원하지 않고 당연히 살려야 한다고 외치는 다정하고 멋진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는 지구도 난리인데 달까지 신경 쓸 겨를이 있냐는 질문은 통하지 않는다. 단 한 사람도 구하지 못하는 세상은 그 누구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이들은 진작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단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애쓰는 세상만이 결국 모두를 구할 수도 있다고, 이들은 여기서 열심히 하나같이 외치고 있었다.

세미나 중 왜 하필 다양한 인권 주제 중에 퀴어인권을 택해서 퀴어동네 주민이 되었느냐는 물음이 기억난다. 나는 아직 퀴어동네 가입 이유를 구체적으로 밝힌 적이 없다. 사실 너무 개인적이어서 조금 부끄럽기도 했다. 이 기회에 밝히자면, 나는 친구들을 이 날선 세상으로부터 지키고 싶었다. 친구들이 조금 더 오래 살고, 조금 더 행복하게 살고, 조금 더 당당하게 살았으면 했다. 그렇게 우리 오래오래 함께 놀자는 유치한 마음이었다. 이 마음이 모두를 위한 마음이 될 수 있을 때까지 함께 가보고 싶었다.

소행성이 충돌한 지구의 인간들은 달에 홀로 살아있는 리아를 위해 기록을 남긴다. ‘당신을 데리러 가겠습니다.’ 비록 닿지 않을지라도. 퀴어동네의 첫 번째 세미나가 그런 기록이 될 수 있기를 바랐다, 아직은 닿지 않은 당신에게. 이 기록이 언제 어떻게 전해질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당신을 위해 기록을 남기고 있다. 혼자가 아니다. 우리는 만날 것이고, 우리는 서로에게 서로의 세계를 줄 것이다. 혐오 대신 사랑과 연대로서, 우리는 살아남을 것이다. 궤도의 밖에 있는 듯한 당신에게 이 기록을 보낸다.

‘당신을 만나러 가겠습니다.’

토요일, 퀴어동네에서 주민들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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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이 된 노란봉투법, 차별금지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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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빛별 공인노무사(퀴어동네 회원)

지난달 24일,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2·3조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노란봉투법’이라 불리던 이 개정은 기업이 노조를 상대로 남발하던 손해배상·가압류를 제한하고, 원청 사용자에게도 교섭 책임을 지우는 내용을 담고 있다. 노동계가 20년 가까이 요구해온 염원이 마침내 현실이 된 것이다.

노란봉투법의 필요성은 오래전부터 현장에서 절실하게 제기됐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은 파업 뒤 회사가 제기한 수십억 원대 손배 소송에 시달려야 했다. 금속노조 KEC지회 조합원들은 회사가 제기한 30억원대의 손배에 매달 임금 차압을 견뎌가며 갚아냈다. 막대한 금액의 손배 소송은 사실상 노동자들의 목을 조르는 수단이었다. 2014년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서 노란봉투 캠페인을 벌인 것도 이런 사정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수많은 시민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거액의 손해배상을 함께 갚으며, 손해배상과 가압류가 얼마나 부당하게 남용돼 왔는지를 사회적 의제로 끌어올렸다. 그때부터 “법을 고쳐야 한다”는 목소리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번 노조법 개정은 그 오랜 싸움의 결실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현장의 갈등이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부당노동행위도, 노조탄압도 여전히 계속된다. 그런데도 노란봉투법이 그토록 필요했던 이유는, 그것이 공정한 싸움을 위한 최소한의 규칙이기 때문이다. 도착점을 찍은 것이 아니라 출발선을 그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최소한의 출발선을 그어보자고 20년째 제정을 외치고 있는 법이 있다. 바로 차별금지법이다. 차별금지법이 제정된다고 해서 모든 차별이 사라질 리 만무하다. 하지만 차별금지법이 있다면, 최소한 고용이나 교육·서비스와 같은 공적 영역에서 차별을 드러내고 문제 삼을 수 있는 언어와 절차를 갖게 될 것이다. 법이 없다는 이유로 차별이 없는 것처럼 취급되던 현실이, 법이 제정되면 달라질 수 있다. 그것은 절실한 출발선이다.

두 법은 같은 목적을 갖는다. 입법을 통해 갈등을 없애겠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싸울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을 만들자는 것이다. 법은 완성형이 아니다. 법은 사회적 갈등을 공정하게 다루기 위한 최소한의 약속이다.

2007년 첫 법안이 발의된 이래, 차별금지법은 거의 20년 동안 수차례 발의와 폐기를 반복했다. 그 과정에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말은 늘 정치권의 핑계가 돼왔다. 그러나 사회적 합의는 이미 이뤄졌다. 2020년 국가인권위원회 조사에서 국민의 88.5%가 차별금지법 제정에 찬성했다. 올해 직장갑질119가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70.7%가 찬성했다. 정치권이 책임을 방기한 사이 차별금지법을 왜곡하고 가짜 공포를 퍼뜨리는 목소리만 커졌을 뿐이다.

최근 들어 변화의 신호도 보인다. 정부는 여성가족부를 성평등가족부로 바꾸겠다고 했고, 원민경 장관은 후보자 시절 차별금지법 취지에 긍정적인 뜻을 밝혔다. 이러한 변화의 흐름도 시민들이 이끌고 지켜온 결과다. 우리는 출발선 뒤에서 너무 오래 기다리고 있었다. 그냥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누가 우리의 출발선을 함부로 뭉개지 못하도록 함께 지키고 서 있었다. 이제는 그 너머로 함께 발을 디딜 때다. 노란봉투법이 끝내 그 출발선을 새겨내고 그 너머를 딛기 시작한 것처럼, 차별금지법도 이제는 출발선 너머를 디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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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 없는 일터 없이는 산업재해 근절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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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진 퀴어동네 회원

최근 이재명 대통령이 산업재해 근절을 강조하고 있다. 징벌적 손해배상, 입찰 제한, 과징금 제도, 안전 관리 미비 사업장 신고 시 파격적인 포상금 지급 등 여러 방안이 논의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된 지 3년이 지났지만 실형은 손에 꼽을 만큼 드물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산업재해 문제를 다시 공론화하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논의의 초점이 업무상 사고, 특히 사망사고에만 맞춰져 있다는 점은 아쉽다. 매일같이 노동자가 일하다 목숨을 잃는 사회에서 사망사고가 우선시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기도 하지만, 죽음까지 이르지 않는 질병들은 제대로 된 관심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언젠가 직장내 괴롭힘으로 우울증을 겪던 한 지인이 “죽어야 회사도 사회도 관심을 보이지 않겠냐”고 말했었다. 마침 직장내 괴롭힘으로 인한 기상캐스터의 사망 사건이 크게 보도되던 시점이었다. 죽음 앞에서야 비로소 쏟아지는 사회적 관심을 떠올리면, 그의 말은 씁쓸하지만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정신질환 산재는 최근 급격히 증가하고 있지만, 업무상 질병 중에서도 아직 많은 관심을 받지 못하는 작은 영역이다. 그나마 2019년 ‘직장내 괴롭힘법’이 제정된 이후 산재 신청이 늘면서 인정률도 늘었다. 그 이전에는 직장내 괴롭힘으로 인한 정신질환이 없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런 현상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적절하게 명명되고 조명되고서야 비로소 드러나는 것뿐이다.

이처럼 제대로 다뤄지지 못하고 있는 영역 중 하나가 성소수자 노동자의 정신건강 문제다. 2025년 4월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젠더와노동건강권센터와 퀴어노동법률지원네트워크가 공동으로 실시한 성소수자 노동자 노동실태 및 정신건강 연구에 따르면 성소수자 노동자의 우울증상, 자살사고, 자살시도, 수면장애는 일반인구집단에 비해 각각 4.3배, 3.6배, 4.5배, 3.3배 높았다. 성소수자 노동자가 일반적인 노동 스트레스에 더해, 성소수자로서 겪는 차별과 배제라는 추가적인 압박에 시달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연구 참가자 다수는 직장에서 성소수자가 아닌 척 거짓말한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40% 가량은 직장 동료로부터 성소수자에 관한 부정적인 메시지를 접하거나, 성소수자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거나 치료받을 필요가 있다는 말을 직간접적으로 들었다. 이런 차별 경험은 곧바로 높은 우울증상 유병률과 연결됐다. 언어폭력, 성희롱, 왕따나 괴롭힘 등 직장 내 폭력을 경험한 비율도 일반인구집단에 비해 상당히 높았으며, 이 역시 우울증상과 긴밀히 연관돼 있었다.

성소수자 노동자의 우울증과 자살 충동은 개인의 취약성 문제가 아니라 노동환경에서 비롯된 명백한 산재다. 따라서 산재 근절 정책에도 정신건강 문제가 반드시 포함돼야 하고, 산재 요인으로서 성적 지향과 정체성으로 인한 차별을 진지하게 다뤄야 한다.

그러나 대통령이 알아서 이를 고민할 리는 만무하다. 오랜 기간 미뤄 온 차별금지법에 대해, “무겁고 급한 일”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그는 어떤 면에서는 산재를 줄이고 있을지 모르지만, 어떤 면에서는 산재를 방치하고 있는 셈이다.

답은 뻔하다. 차별 없는 일터 없이는 산업재해 근절도 없다고, 더 나은 사회를 요구하는 여러 운동이 서로 연결돼 강력하게 목소리를 낼 때만 변화가 가능할 것이다.

노조도 예외가 아니다. 연구 설문 응답자 중 직장에 노조가 있다고 응답한 비율은 무려 30%나 됐지만, 성소수자 친화적인 노조가 있다는 응답은 5.3%에 불과했다. 대다수 성소수자 노동자는 노조조차 자신들을 환영하지 않는다고 느꼈다. 연구에서 강조한 것과 같이, 회사 내에 그리고 회사를 넘어 사회에 변화를 불러올 수 있는 주체로서 노조의 역할도 고민해봐야 할 시점이다.

퀴어노동법률지원네트워크 (qqdong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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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트릭스 루미에게 보내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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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 속 걸그룹 헌트릭스

*아랫글은 애니메이션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루미님 안녕하세요. 얼마 전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보고 걸그룹 헌트릭스의 팬이 된 직장인입니다. 오늘 출근길에는 글쎄, 헌트릭스와 관련한 영상을 보다가 내릴 역을 지나쳤지 뭐예요. <테이크다운 Take Down>을 들으며 빠른 걸음으로 길을 되돌아오면서 루미님에게 팬레터를 쓰기로 결심했어요. 먼저 좋은 음악을 들려줘 감사하다는 말을 전합니다. 시원하게 고음을 내지르는 헌트릭스의 노래를 들으면 하루의 스트레스가 날아가고 금빛 찬란한 세상에서 나쁜 놈들은 다 끌어내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됩니다.

이렇게 펜을 든 건, 루미님의 이야기가 퀴어 노동권 활동을 하며 만나본 직장 내 퀴어들의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루미님처럼 멋지고 화려한 케이팝 스타에게 동료에게도 말 못 할 정체성 고민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답니다. 헌터와 데몬 사이에서 태어나 존재 자체가 실수고, 본모습을 감추라는 말만 듣고 자라온 점이 퀴어들이 사회로부터 받는 억압과 너무 닮았어요. 자신이 아닌 척해야지만 이 사회에서 자리를 얻는다는 점이 특히 그랬습니다.

루미님이 몸을 감추기 위해 긴팔만 입고 목욕탕도 가지 못하는 것을 보며 주민등록번호, 화장실, 유니폼, 기숙사 등 자연스럽고 사소해 보이는 것들 때문에 일자리에서 배제되는 사람들을 생각했습니다. 남들과 다르다는 것, 드러내지 못하는 것, 비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거짓말을 만들어 내고 동료들과 깊이 친해질 수 없는 벽이 됩니다. 완벽히 일을 해내는 것밖에는 자신을 보호할 방법이 없어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업무 스트레스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그래도 많은 퀴어가 자신의 모습 그대로 살기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직장에서도 어떻게 해서든 동료를 얻고야 맙니다. 루미님이 진우를 만난 것처럼요. 혐오가 정답이 아니란 걸 아는 당신은, 상대를 혐오하는 노래 가사를 바꾸고 파란 호랑이가 전해준 편지를 따라 진우를 만나러 갑니다. “난 네가 실수라고 생각 안 해”라는 진우의 말이 마음을 열게 했고 서로를 함께 구원할 방법을 찾습니다.

그래서 직장에서 커밍아웃은 도전이자 고민거리입니다. 커밍아웃은 이 세계에서 친구와 동료를 얻는 확실한 방법이지만, 때로 실패하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모두가 보는 곳에서 원치 않는 방식으로 정체성을 공개 당하고, 같은 팀 멤버인 미라와 조이마저 “우리 편인 걸 증명하라”고 했을 때 루미님 마음이 얼마나 무너졌을까요.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나고 미라와 조이가 원망스럽습니다. 그렇지만 셀린 앞에서 죽음을 결심한 건 너무 심했어요. 우린 더 이상 친구들을 잃고 싶지 않아요.

루미님. 많은 팬이 남산에서의 공연을 잊지 못합니다. 악령이 되어가는 팬들을 돌려세운 건 자신에 대한 긍정을 포기하지 않은 루미님이었습니다. 무시무시한 귀마 앞에서 먼저 무대에 올라 노래를 시작하고 미라와 조이가 루미님 곁으로 돌아와 완전체로 화음을 맞출 때, 감추기만 했던 루미님의 문양이 모두 앞에서 무지개로 빛이 났던 건 정말이지 아름다운 순간이었습니다.

영화는 초반에, 세상을 지키는 혼문은 사람들의 연결(Connection)로 완성된다고 설명합니다. 최근 탄핵 집회의 응원봉 물결에서 정말로 그러한 연결을 느꼈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정체성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발언을 시작하고, 서로 연대했으며 새로운 세상에서는 차별이 없어지는 게 가장 먼저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다름’이 흉이 아닌 자긍심이 되는 날이 곧 올 수 있을 것만 같았죠. 그런데 악귀 같은 대통령이 물러난 지금도 차별금지법 제정 등 중요한 일이 자꾸만 나중으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루미님에게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수치심을 주입하는 악령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 세상에서 끝내 자신을 믿고 긍정할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나요.

▲ 여수진(퀴어동네 운영위원, 공인노무사)
▲ 여수진(퀴어동네 운영위원, 공인노무사)

루미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인기가 식을 줄을 모릅니다. <골든 Golden>이 미국 빌보드차트 1위를 했다는 뉴스도 들었어요. 축하드립니다. 설마 이번 앨범이 끝은 아니겠지요. 다음 활동으로 돌아올 헌트릭스가 기대됩니다. 그때까지 반드시 빛날 거라고 용기를 주는 골든의 가사를 되새기면서 컴백을 기다리겠습니다.

퀴어노동법률지원네트워크 (qqdong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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