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고기는 내가 살게, 무는 네가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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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세정(소순) 퀴어동네 운영위원

9월이 시작하는 날이었다. 평소 별다른 연락이 없던 집 건물주에게서 전화가 왔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내가 사는 집 위층에 불이 났고 출동한 소방관들이 우리 집 현관문을 강제로 개방하면서 문이 부서져 오늘부터 집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전화를 끊고 잠시 멍해졌다. 하던 일을 마저 끝내고 하루 묵을 숙소를 찾은 뒤 사무실을 나섰다. 그때는 몰랐다. 9월의 마지막 날까지 꼬박 한 달을, 집이 있는데도 없는 사람처럼 지내게 될 줄은.

처음 2주는 금방 집에 돌아가리라 생각하고 고정 숙소를 구하지 않고 날마다 거처를 옮겨 다녔다. 하지만 숙박업소에서만 지낼 수는 없었다. 괜찮은 곳은 비용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염치없이 친구들의 집에 하루씩 신세를 지기로 했다. 오래된 친구의 혼자 사는 집, 가족과 사는 집, 여행으로 비어있는 집, 친구의 동거인이 쓰는 작업실 등 ‘하루살이 내 집’이 여러 곳 생겼다. 집을 내어 준 사람은 제각각이었지만, “우리 집도 괜찮으면 와”라며 편히 지내라는 말을 덧붙이는 건 모두 같았다.

얼마 전 영화 <사람과 고기>를 보았다. 폐지를 줍거나 길가 좌판에서 채소를 팔며 근근이 살아가는 독거 노인 셋이 고깃집을 돌아다니며 무전취식하고 도망치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세 사람은 소고기뭇국을 끓여 나눠 먹으며 친해지는데, “소고기는 내가 살게 무는 자네가 사”라는 말에서 시작된다. 웃고 울고 감격한 장면 중에서도 유독 그 대사가 마음에 남았다. 언젠가 늙고, 힘없고, 돈 없는 나와 내 친구들이 저런 대화를 나누며 지내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2022년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가 발간한 ‘2차 성소수자 노후인식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성소수자들이 노후 생활에서 가장 큰 어려움으로 꼽은 것은 빈곤, 질병, 고독 다음으로 ‘나를 돌봐줄 사람’이었다. 나와 내 친구들 대부분은 결혼할 생각이 없거나 애초에 법적으로 혼인할 수 없다. 원가족과 살거나 새로운 가족을 꾸리는 대신 혼자 사는 경우가 많다. 일하지 않으면 생계를 유지하기 어렵고, 부모나 자신을 위한 돌봄을 대비하기도 힘들다. 살아본 적도, 배운 적도, 충분히 이야기해 본 적도 없는 우리에게 노년과 고립, 고독, 돌봄의 공백은 구체적인 두려움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서로 곁에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싶다. 하루살이 내 집에 누워 혼자인 삶과 함께인 삶을 잠시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아무 연고 없는 곳에서 하루아침에 집이 사라졌다면 어땠을까. 출근은 해야 하는데 모든 걸 던지고 고향으로 갈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면 보상을 받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적지 않은 돈을 들여 숙소를 구해야 했을 것이다. 혼자인 삶을 상상하니 고민이 꼬리를 물었다. 하지만 고민만 가득하던 상상은 ‘그래도 함께인 삶이라 오늘 이렇게 누워 있을 수 있네’ 하는 안심으로 끝났다. 집 없고, 돈 없고, 힘없어도 지금처럼 연결돼 있다면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와 영화 이야기를 하다가, 오래전 친구와 ‘할머니 페미’가 되어 오토바이를 여러 대 몰고 신촌오거리를 마비시키자고 약속했었다는 말을 들었다. 걱정은 많지만, 사실 할머니가 되면 어떻게 살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다만 언젠가 “우리 집에서 같이 밥 먹자. 소고기는 내가 살게 무는 네가 사 와”라고 말하며 모여 소고기뭇국을 끓여 먹고, 할머니 페미 오토바이 부대로 신촌오거리를 점거하며 살아갈 것 같기는 하다. 그날까지 질긴 고기도 넉넉하게 씹어 넘길 수 있게 치아 관리를 잘하고, 오토바이 점거 인원이 모자라지 않게 서로를 잘 살펴야겠다. 우리 일상과 공간을 주고받으며 같이 살고, 같이 늙자. 우리 집에 올 때는 무를 꼭 사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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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부부의 사실혼 관계 인정받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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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이 퀴어동네 운영위원

2024년 7월 대법원은 동성 부부의 국민건강보험 직장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사실혼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는 국민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하면서, 동성 동반자에게만 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합리적 이유가 없는 차별이라는 판단이었다. 동성 동반자의 권리를 처음으로 인정한 역사적인 판결이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지난달 28일 건강보험공단이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배우자 피부양자 자격 취득 건수는 지난해 6건, 올해 8월 말 기준 12건 등 모두 18건으로 조사됐다. 이 가운데 현재 동성 배우자 피부양자 자격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10명에 불과하다.

판결 이후에도 직장피부양자 인원이 10명에 그친 것은 요건이 까다로운 데다 회사에 이를 알릴 수밖에 없기 때문으로 보인다. 직장가입자의 경우 인사팀이나 총무팀을 통해 피부양자 등록을 요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본인이 직접 동성 배우자를 피부양자로 등록하더라도 급여 지급을 위한 4대 보험 관리나 연말정산 과정에서 직장피부양자 신분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즉, 회사 내 공개 커밍아웃이 가능한 ‘퀴어친화적’ 조직문화가 뒷받침돼야 하지만, 한국에서 이런 문화를 가진 회사는 아직 드물다.

직장피부양자로 등록된 뒤에도 문제가 이어진다. 건보공단은 지역별로 ‘자격관리 심의위원회’를 열어 매년 피부양자 자격 취득의 적정성을 심사한다. 이 과정에서 생활공동체 관계 성립일을 명시한 공증서류, 내국인 2인의 인우보증서, 혼인관계증명서와 신분증, 동성 동반자 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객관적 증빙자료를 제출하도록 요구한다. 증빙자료는 결혼, 재산, 생활비 등 항목으로 구분돼 있으며, 하객 5명 이상의 결혼식 사진이나 청첩장, 공동명의 계좌, 부동산등기부등본 또는 임대차계약서 등을 택해 제출해야 한다.

건강보험공단이 요구하는 이런 서류는 사실혼 관계에 있는 이성 부부에게 요구되는 자료와 크게 다르지 않다. 결국 단순 동거와 사실혼 관계를 구분하는 핵심 기준은 ‘사회적 인정’이다. 그러나 많은 동성 부부가 벽장 속에 숨어 사회적 인정을 받지 못하는 현실을 고려하면, 친구나 가족 등에게 관계를 공개하지 않았을 경우 사실혼이 아닌 단순 동거로 판단될 가능성이 크다.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어려운 동성 부부는 요건을 충족하기 위해 오히려 관계의 단절이나 차별의 위험을 감수하고 커밍아웃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놓인다.

공단이 주장했던 것처럼 한 달에 수만 원 정도만 부담하면 지역가입자로서 건강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으므로 사실혼 관계를 인정받는 실익이 크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혼 관계를 인정하는 사회보험은 건강보험 외에도 국민연금, 공무원연금, 산재보험 등이 있다. 특히 국민연금의 유족연금은 생계를 같이하던 배우자가 사망할 경우 그 권리를 승계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국민연금법 3조2항은 수급권자 대상에 사실상 혼인 관계에 있는 자를 포함하고 있다. 지난 국정감사에서 보건복지부 장관이 “국민연금도 건강보험과 같은 사회보험이므로 같은 기준으로 가야 한다”고 밝힌 만큼, 동성 부부의 4대 보험 적용은 건강보험공단의 사실혼 관계 기준을 따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사실혼 관계에 있는 이성 부부에게 요구되는 서류를 동일하게 동성 부부에게 일괄 요구하기보다, 동성 부부의 관계적 특성과 현실적 여건을 고려해 사실혼 인정 기준을 완화하거나 별도의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나아가 이러한 제도 개선은 단순히 행정 절차의 정비에 그칠 것이 아니라, 커밍아웃해도 차별받지 않는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인식의 전환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현재 피부양자 자격을 유지하는 인원 수가 보여주듯, 법과 제도의 보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은 성적 지향과 관계없이 누구나 차별받지 않고 동등한 권리를 인정받는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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궤도의 밖에서, 당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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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란다 공인노무사(퀴어동네 회원)

소행성이 날아와 지구의 대부분이 박살 난다. 곳곳에 불바다가 생겨 먹구름으로 하늘이 가득 차 태양 빛이 닿지 않는 곳은 얼어붙고 지진과 해일이 덮쳐온다. 소수의 인간만이 살아남는다. 지구는 폐허가 되고 문명의 복구는 요원하다. 그런데 달에서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저기 사람이 있다. 지구는 그를 구해야 할까?

전삼혜 작가의 <궤도의 밖에서, 나의 룸메이트에게>라는 작품의 줄거리 중 일부다. 책장을 넘기며 고민했다. 달로 우주선을 보내야 할까? 수십억 명이 죽었고 살아남은 이들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고작 한 명을 위해? 지하철에서 엉뚱한 고민만 내내 하며 나는 퀴어동네 회원세미나로 향했다.

지난 토요일, 퀴어동네 주민들은 세미나를 열었다. ‘일터를 퀴어링’이라는 이름의 세미나는 두 섹션으로 진행됐다. 1섹션은 퀴어동네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가 함께 진행한 연구인 ‘성소수자 노동실태와 정신건강연구’에 대한 발제와 토론이었고, 2섹션은 누구나 노조지회 사례를 중심으로 살펴본 ‘노조운동의 퀴어링’에 대한 발제와 토론이었다.

퀴어들은 일터에서 존재가 지워진다. 그 존재가 가시화될 때 으레 따라오는 것은 차별과 혐오다. 퀴어는 불편한 존재가 되거나 무시하는 존재가 된다. 그에 관한 토론으로 ‘커밍아웃 할당제’라는 급진적인 제도가 제안되기도 했다. 모두가 뜻을 모아 “여기에 퀴어가 있다”고 소리치자고.

누구나 노조지회는 탄핵 정국 당시 광장에 나왔던 이들이 주축이 돼 만든 민주일반노조 산하 지회이다. 프리랜서, 학생, 자영업자 등 다양한 특성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발견된 공통점은 퀴어다. 광장에 빼곡하게 나부끼던 무지개 깃발을 생각하면 딱히 놀랄 일도 아니건만, 새삼스럽게 놀라고 만다.

세미나 내내 던져진 화두는 하나하나가 다 반짝였다. 각자의 일터에서 일을 하며 차곡차곡 쌓인 고민부터 노동인권을 위해 길바닥을 방바닥 삼아 지냈던 시간이 피워낸 질문은 함께 고민할 동지를 만나 폭죽처럼 팡팡 터졌다. 일단 우리의 첫 번째 임무는 일터 곳곳에 있을 퀴어를 ‘만나야 한다’라는 것이었다. 불편하든 낯설든 좋으니, 그가 그곳에 있다고 발견해야 했다.

퀴어동네 주민들의 토론을 들으며 나는 소행성이 충돌한 지구에서 살아남은 자가 된 기분이었다. 달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기꺼이 살리자고 이야기했을 이들의 목소리가 이렇지 않았을까? 사람이 있다는 걸 발견하고, 그를 하나라는 숫자로 환원하지 않고 당연히 살려야 한다고 외치는 다정하고 멋진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는 지구도 난리인데 달까지 신경 쓸 겨를이 있냐는 질문은 통하지 않는다. 단 한 사람도 구하지 못하는 세상은 그 누구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이들은 진작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단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애쓰는 세상만이 결국 모두를 구할 수도 있다고, 이들은 여기서 열심히 하나같이 외치고 있었다.

세미나 중 왜 하필 다양한 인권 주제 중에 퀴어인권을 택해서 퀴어동네 주민이 되었느냐는 물음이 기억난다. 나는 아직 퀴어동네 가입 이유를 구체적으로 밝힌 적이 없다. 사실 너무 개인적이어서 조금 부끄럽기도 했다. 이 기회에 밝히자면, 나는 친구들을 이 날선 세상으로부터 지키고 싶었다. 친구들이 조금 더 오래 살고, 조금 더 행복하게 살고, 조금 더 당당하게 살았으면 했다. 그렇게 우리 오래오래 함께 놀자는 유치한 마음이었다. 이 마음이 모두를 위한 마음이 될 수 있을 때까지 함께 가보고 싶었다.

소행성이 충돌한 지구의 인간들은 달에 홀로 살아있는 리아를 위해 기록을 남긴다. ‘당신을 데리러 가겠습니다.’ 비록 닿지 않을지라도. 퀴어동네의 첫 번째 세미나가 그런 기록이 될 수 있기를 바랐다, 아직은 닿지 않은 당신에게. 이 기록이 언제 어떻게 전해질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당신을 위해 기록을 남기고 있다. 혼자가 아니다. 우리는 만날 것이고, 우리는 서로에게 서로의 세계를 줄 것이다. 혐오 대신 사랑과 연대로서, 우리는 살아남을 것이다. 궤도의 밖에 있는 듯한 당신에게 이 기록을 보낸다.

‘당신을 만나러 가겠습니다.’

토요일, 퀴어동네에서 주민들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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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이 된 노란봉투법, 차별금지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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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빛별 공인노무사(퀴어동네 회원)

지난달 24일,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2·3조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노란봉투법’이라 불리던 이 개정은 기업이 노조를 상대로 남발하던 손해배상·가압류를 제한하고, 원청 사용자에게도 교섭 책임을 지우는 내용을 담고 있다. 노동계가 20년 가까이 요구해온 염원이 마침내 현실이 된 것이다.

노란봉투법의 필요성은 오래전부터 현장에서 절실하게 제기됐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은 파업 뒤 회사가 제기한 수십억 원대 손배 소송에 시달려야 했다. 금속노조 KEC지회 조합원들은 회사가 제기한 30억원대의 손배에 매달 임금 차압을 견뎌가며 갚아냈다. 막대한 금액의 손배 소송은 사실상 노동자들의 목을 조르는 수단이었다. 2014년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서 노란봉투 캠페인을 벌인 것도 이런 사정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수많은 시민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거액의 손해배상을 함께 갚으며, 손해배상과 가압류가 얼마나 부당하게 남용돼 왔는지를 사회적 의제로 끌어올렸다. 그때부터 “법을 고쳐야 한다”는 목소리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번 노조법 개정은 그 오랜 싸움의 결실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현장의 갈등이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부당노동행위도, 노조탄압도 여전히 계속된다. 그런데도 노란봉투법이 그토록 필요했던 이유는, 그것이 공정한 싸움을 위한 최소한의 규칙이기 때문이다. 도착점을 찍은 것이 아니라 출발선을 그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최소한의 출발선을 그어보자고 20년째 제정을 외치고 있는 법이 있다. 바로 차별금지법이다. 차별금지법이 제정된다고 해서 모든 차별이 사라질 리 만무하다. 하지만 차별금지법이 있다면, 최소한 고용이나 교육·서비스와 같은 공적 영역에서 차별을 드러내고 문제 삼을 수 있는 언어와 절차를 갖게 될 것이다. 법이 없다는 이유로 차별이 없는 것처럼 취급되던 현실이, 법이 제정되면 달라질 수 있다. 그것은 절실한 출발선이다.

두 법은 같은 목적을 갖는다. 입법을 통해 갈등을 없애겠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싸울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을 만들자는 것이다. 법은 완성형이 아니다. 법은 사회적 갈등을 공정하게 다루기 위한 최소한의 약속이다.

2007년 첫 법안이 발의된 이래, 차별금지법은 거의 20년 동안 수차례 발의와 폐기를 반복했다. 그 과정에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말은 늘 정치권의 핑계가 돼왔다. 그러나 사회적 합의는 이미 이뤄졌다. 2020년 국가인권위원회 조사에서 국민의 88.5%가 차별금지법 제정에 찬성했다. 올해 직장갑질119가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70.7%가 찬성했다. 정치권이 책임을 방기한 사이 차별금지법을 왜곡하고 가짜 공포를 퍼뜨리는 목소리만 커졌을 뿐이다.

최근 들어 변화의 신호도 보인다. 정부는 여성가족부를 성평등가족부로 바꾸겠다고 했고, 원민경 장관은 후보자 시절 차별금지법 취지에 긍정적인 뜻을 밝혔다. 이러한 변화의 흐름도 시민들이 이끌고 지켜온 결과다. 우리는 출발선 뒤에서 너무 오래 기다리고 있었다. 그냥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누가 우리의 출발선을 함부로 뭉개지 못하도록 함께 지키고 서 있었다. 이제는 그 너머로 함께 발을 디딜 때다. 노란봉투법이 끝내 그 출발선을 새겨내고 그 너머를 딛기 시작한 것처럼, 차별금지법도 이제는 출발선 너머를 디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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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 없는 일터 없이는 산업재해 근절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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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진 퀴어동네 회원

최근 이재명 대통령이 산업재해 근절을 강조하고 있다. 징벌적 손해배상, 입찰 제한, 과징금 제도, 안전 관리 미비 사업장 신고 시 파격적인 포상금 지급 등 여러 방안이 논의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된 지 3년이 지났지만 실형은 손에 꼽을 만큼 드물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산업재해 문제를 다시 공론화하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논의의 초점이 업무상 사고, 특히 사망사고에만 맞춰져 있다는 점은 아쉽다. 매일같이 노동자가 일하다 목숨을 잃는 사회에서 사망사고가 우선시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기도 하지만, 죽음까지 이르지 않는 질병들은 제대로 된 관심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언젠가 직장내 괴롭힘으로 우울증을 겪던 한 지인이 “죽어야 회사도 사회도 관심을 보이지 않겠냐”고 말했었다. 마침 직장내 괴롭힘으로 인한 기상캐스터의 사망 사건이 크게 보도되던 시점이었다. 죽음 앞에서야 비로소 쏟아지는 사회적 관심을 떠올리면, 그의 말은 씁쓸하지만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정신질환 산재는 최근 급격히 증가하고 있지만, 업무상 질병 중에서도 아직 많은 관심을 받지 못하는 작은 영역이다. 그나마 2019년 ‘직장내 괴롭힘법’이 제정된 이후 산재 신청이 늘면서 인정률도 늘었다. 그 이전에는 직장내 괴롭힘으로 인한 정신질환이 없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런 현상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적절하게 명명되고 조명되고서야 비로소 드러나는 것뿐이다.

이처럼 제대로 다뤄지지 못하고 있는 영역 중 하나가 성소수자 노동자의 정신건강 문제다. 2025년 4월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젠더와노동건강권센터와 퀴어노동법률지원네트워크가 공동으로 실시한 성소수자 노동자 노동실태 및 정신건강 연구에 따르면 성소수자 노동자의 우울증상, 자살사고, 자살시도, 수면장애는 일반인구집단에 비해 각각 4.3배, 3.6배, 4.5배, 3.3배 높았다. 성소수자 노동자가 일반적인 노동 스트레스에 더해, 성소수자로서 겪는 차별과 배제라는 추가적인 압박에 시달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연구 참가자 다수는 직장에서 성소수자가 아닌 척 거짓말한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40% 가량은 직장 동료로부터 성소수자에 관한 부정적인 메시지를 접하거나, 성소수자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거나 치료받을 필요가 있다는 말을 직간접적으로 들었다. 이런 차별 경험은 곧바로 높은 우울증상 유병률과 연결됐다. 언어폭력, 성희롱, 왕따나 괴롭힘 등 직장 내 폭력을 경험한 비율도 일반인구집단에 비해 상당히 높았으며, 이 역시 우울증상과 긴밀히 연관돼 있었다.

성소수자 노동자의 우울증과 자살 충동은 개인의 취약성 문제가 아니라 노동환경에서 비롯된 명백한 산재다. 따라서 산재 근절 정책에도 정신건강 문제가 반드시 포함돼야 하고, 산재 요인으로서 성적 지향과 정체성으로 인한 차별을 진지하게 다뤄야 한다.

그러나 대통령이 알아서 이를 고민할 리는 만무하다. 오랜 기간 미뤄 온 차별금지법에 대해, “무겁고 급한 일”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그는 어떤 면에서는 산재를 줄이고 있을지 모르지만, 어떤 면에서는 산재를 방치하고 있는 셈이다.

답은 뻔하다. 차별 없는 일터 없이는 산업재해 근절도 없다고, 더 나은 사회를 요구하는 여러 운동이 서로 연결돼 강력하게 목소리를 낼 때만 변화가 가능할 것이다.

노조도 예외가 아니다. 연구 설문 응답자 중 직장에 노조가 있다고 응답한 비율은 무려 30%나 됐지만, 성소수자 친화적인 노조가 있다는 응답은 5.3%에 불과했다. 대다수 성소수자 노동자는 노조조차 자신들을 환영하지 않는다고 느꼈다. 연구에서 강조한 것과 같이, 회사 내에 그리고 회사를 넘어 사회에 변화를 불러올 수 있는 주체로서 노조의 역할도 고민해봐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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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트릭스 루미에게 보내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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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 속 걸그룹 헌트릭스

*아랫글은 애니메이션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루미님 안녕하세요. 얼마 전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보고 걸그룹 헌트릭스의 팬이 된 직장인입니다. 오늘 출근길에는 글쎄, 헌트릭스와 관련한 영상을 보다가 내릴 역을 지나쳤지 뭐예요. <테이크다운 Take Down>을 들으며 빠른 걸음으로 길을 되돌아오면서 루미님에게 팬레터를 쓰기로 결심했어요. 먼저 좋은 음악을 들려줘 감사하다는 말을 전합니다. 시원하게 고음을 내지르는 헌트릭스의 노래를 들으면 하루의 스트레스가 날아가고 금빛 찬란한 세상에서 나쁜 놈들은 다 끌어내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됩니다.

이렇게 펜을 든 건, 루미님의 이야기가 퀴어 노동권 활동을 하며 만나본 직장 내 퀴어들의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루미님처럼 멋지고 화려한 케이팝 스타에게 동료에게도 말 못 할 정체성 고민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답니다. 헌터와 데몬 사이에서 태어나 존재 자체가 실수고, 본모습을 감추라는 말만 듣고 자라온 점이 퀴어들이 사회로부터 받는 억압과 너무 닮았어요. 자신이 아닌 척해야지만 이 사회에서 자리를 얻는다는 점이 특히 그랬습니다.

루미님이 몸을 감추기 위해 긴팔만 입고 목욕탕도 가지 못하는 것을 보며 주민등록번호, 화장실, 유니폼, 기숙사 등 자연스럽고 사소해 보이는 것들 때문에 일자리에서 배제되는 사람들을 생각했습니다. 남들과 다르다는 것, 드러내지 못하는 것, 비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거짓말을 만들어 내고 동료들과 깊이 친해질 수 없는 벽이 됩니다. 완벽히 일을 해내는 것밖에는 자신을 보호할 방법이 없어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업무 스트레스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그래도 많은 퀴어가 자신의 모습 그대로 살기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직장에서도 어떻게 해서든 동료를 얻고야 맙니다. 루미님이 진우를 만난 것처럼요. 혐오가 정답이 아니란 걸 아는 당신은, 상대를 혐오하는 노래 가사를 바꾸고 파란 호랑이가 전해준 편지를 따라 진우를 만나러 갑니다. “난 네가 실수라고 생각 안 해”라는 진우의 말이 마음을 열게 했고 서로를 함께 구원할 방법을 찾습니다.

그래서 직장에서 커밍아웃은 도전이자 고민거리입니다. 커밍아웃은 이 세계에서 친구와 동료를 얻는 확실한 방법이지만, 때로 실패하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모두가 보는 곳에서 원치 않는 방식으로 정체성을 공개 당하고, 같은 팀 멤버인 미라와 조이마저 “우리 편인 걸 증명하라”고 했을 때 루미님 마음이 얼마나 무너졌을까요.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나고 미라와 조이가 원망스럽습니다. 그렇지만 셀린 앞에서 죽음을 결심한 건 너무 심했어요. 우린 더 이상 친구들을 잃고 싶지 않아요.

루미님. 많은 팬이 남산에서의 공연을 잊지 못합니다. 악령이 되어가는 팬들을 돌려세운 건 자신에 대한 긍정을 포기하지 않은 루미님이었습니다. 무시무시한 귀마 앞에서 먼저 무대에 올라 노래를 시작하고 미라와 조이가 루미님 곁으로 돌아와 완전체로 화음을 맞출 때, 감추기만 했던 루미님의 문양이 모두 앞에서 무지개로 빛이 났던 건 정말이지 아름다운 순간이었습니다.

영화는 초반에, 세상을 지키는 혼문은 사람들의 연결(Connection)로 완성된다고 설명합니다. 최근 탄핵 집회의 응원봉 물결에서 정말로 그러한 연결을 느꼈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정체성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발언을 시작하고, 서로 연대했으며 새로운 세상에서는 차별이 없어지는 게 가장 먼저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다름’이 흉이 아닌 자긍심이 되는 날이 곧 올 수 있을 것만 같았죠. 그런데 악귀 같은 대통령이 물러난 지금도 차별금지법 제정 등 중요한 일이 자꾸만 나중으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루미님에게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수치심을 주입하는 악령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 세상에서 끝내 자신을 믿고 긍정할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나요.

▲ 여수진(퀴어동네 운영위원, 공인노무사)
▲ 여수진(퀴어동네 운영위원, 공인노무사)

루미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인기가 식을 줄을 모릅니다. <골든 Golden>이 미국 빌보드차트 1위를 했다는 뉴스도 들었어요. 축하드립니다. 설마 이번 앨범이 끝은 아니겠지요. 다음 활동으로 돌아올 헌트릭스가 기대됩니다. 그때까지 반드시 빛날 거라고 용기를 주는 골든의 가사를 되새기면서 컴백을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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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민주당 ‘사회적 합의’ 변명이 비겁한 까닭

칼럼

▲ 김시운 공인노무사(퀴어동네 운영위원)

18년간 11번. 국회에 차별금지법이 발의된 숫자다. 본회의 상정조차 된 적이 없으니 폐기된 횟수와 같다. 그렇게 차별금지법이 마르고 닳도록 국회 문턱에서 좌절하는 동안, 최근 더불어민주당의 입장은 확고했다. 나중에, 그리고 사회적 합의. 그래서 이재명 정부의 첫 번째 인사에서 가장 눈길이 갔던 장면은 김민석 국무총리의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한 “사회적 합의” 입장이었다. 그는 어떤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지 묻는 기자의 질문에 “종교적 신념으로 차별금지법을 비판할 때 처벌받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절박한 목소리가 있다”며 논의가 더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노무현 정부에서 차별금지법 제정을 입법예고한 이후, 민주당이 18년간 그 사회적 논의에서 어떤 역할을 해왔는지에 대한 의문은 별론으로 하고, 이는 사실관계부터 틀린 주장이다. 현재까지 폐기된 차별금지법 발의안 11건은 차별행위 그 자체를 형사처벌하지 않는다. 마치 직장내 괴롭힘을 규율하는 근로기준법처럼, 차별행위에 대해 진정을 제기했다는 이유로 징계 등 불이익 처분을 한 경우에만 처벌조항을 두고 있다. 즉, 처벌보다는 사회 전반의 차별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는 차원에 가까운 법이다. 그런데도 김 총리는 “설교하다가 잡혀간다”는 종교계의 과장된 공포 선동 논리를 그대로 가져와 사회적 대화가 필요하다는 식으로 입장을 정리하는 무책임한 태도를 보였다.

심지어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였던 강선우 민주당 의원 역시 차별금지법과 비동의강간죄에 대해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사안이라며 회피했다. 소수자와 약자 인권보호에 앞장서야 할 여가부의 리더 후보가 입장을 유보하며 “사회적 합의”라는 마법의 방패 뒤로 숨는 것은 더욱 문제적이다. 갑질 이슈에 묻혔지만, 이재명 정부가 내세우는 ‘성평등’ 부서의 장관이 되기에 그의 자질 자체가 부족했던 것이 근본적인 문제였다.

김민석과 강선우 모두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고, 과거 반동성애 종교현장에 얼굴을 비치며 의견을 피력하거나 함께했던 사실이 의미심장하다. 김 총리는 2023년 기독교 행사에서 “모든 인간이 동성애를 택했을 때 인류가 지속가능하지 못하기 때문에 (동성애는) 보편적 가치가 될 수 없는 것”이며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그에(동성애에) 접하거나 확산되는 것이 분명하므로 분위기에 휩쓸리는 성적 시도는 예방돼야 한다”고 주옥같은 혐오발언을 쏟아냈다. 강 의원은 2023년 차별금지법과 학생인권조례 반대를 주장하는 기자회견에 참석한 바 있다. 이 정도라면 사회적 합의는 겉치레이고 그들 자체가 적극적인 차별금지법 반대론자에 가깝다. 묻고 싶다. 사인으로서 종교적 신념을 갖는 건 자유지만, 정치인으로서 누군가를 차별하는 신념을 정책 결정에 개입시키는 것이 정교분리 국가에서 적절한가? 차별받지 않을 권리보다 종교적 신념을 빙자해 차별을 옹호할 권리가 우선하는가? 이들의 존재 자체가 차별금지법이 입법돼야 하는 이유를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사실 이 대통령은 집권하기 전부터 이미 성소수자 권리증진에는 의지 없음을 실토했다. 그는 지난 5월 TV토론에서 차별금지법에 대해 “현안이 복잡해 새롭게 논쟁·갈등이 심화하면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을 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당선 후 첫 기자회견에서는 “경중선후라는 게 있는데 저는 무겁고 급한 일부터 먼저 하자는 입장”이라며 차별금지법은 상대적으로 급하지 않은 문제라는 입장을 밝혔다.

지난 겨울, 시민들이 단지 민주당 정부를 세우려고 추위에 덜덜 떨며 광장에 나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남태령의 긴 밤, 사회에서 소외 받는 많은 시민이 농민들과 함께 밤을 새웠다. 여성, 성소수자, 이주민, 장애인, 청소년들의 발언으로 여러 집회에 활력이 생겼다. 이들에게 빚졌다며 응원봉을 상찬하던 민주당 의원들은 다 어디 갔을까? 이렇게 혐오자가 인선된 것에 대해 공개적인 비판의 목소리가 있었나? 민주당과 정부의 역할을 기대하며, 이들에게 의존하기만 한다면 차별금지법을 제정할 수 없는 것이 자명하다.

혐오자들 그 자체거나, 혐오자들의 눈치만 보며 방치, 회피하는 제도 정치권만 바라보며 기도를 한다고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지는 않는다. 결국 이들을 압박하려면 혐오세력보다 훨씬 강력한 찬성여론의 힘을 보여줘야 한다. 성소수자 운동의 힘은 물론이고 더 많은 지지자의 연대를 조직해야 한다. 이 사회의 구조적 차별과 혐오에 도전하는 수많은 운동과 성소수자 운동이 함께 만나 굳건한 행동으로 결집할 필요가 있다. 나무 밑에서 감이 떨어지길 기다리며 누워있는 것보다 확실하게 감을 따는 방법은 나무를 흔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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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드러냄과 숨기기, 경계를 넘나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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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리 퀴어동네 운영위원

벽에 최대한 붙어있다. 마치 벽의 일부가 된 것처럼. 지하철이 들어오고, 우르르 사람들이 내린다. 순식간에 100명의 사람을 지나서 지하철 위에 올라탄다. 좌우로 고개를 돌리며 구석진 공간을 찾으려고 애쓴다. 모서리를 찾아 들어가 몸을 기댄다. 빨려 들어가는 듯하다.

서울에 올라와 처음으로 지하철을 탔을 때의 감각이다. 지하철의 속도는 내가 실제로 본 어떤 것보다 빨랐고, 역 안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가득했다. 눈을 돌릴 때마다 가득 찬 얼굴들과 두 눈에서 느껴지는 시선들 때문에 자꾸만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무서웠다. 사람들의 얼굴에 떠오르는 너무 많은 감정과 생각들을 소화하기 어려웠다. 무시할 수도 없었다. 언젠가부터 사람들의 얼굴을 보지 않는다. 사람의 얼굴을 지우고, 표정을 지우고, 하루를 지운다.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사람들에게도 ‘난 지워지겠구나’ 싶어서 조금은 자유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10대 때 꿈꿔왔던 도시의 자유로움이라는 건 결국 익명성에 기대어져 있구나 싶었다. 익명성 안에서 난 ‘덩어리’처럼 느껴지고, 그 안에서 자유로움을 느낀다. 출근길에 파트너와 손을 잡고 서로의 몸에 기대어 사랑을 속삭여도, 아무도 알아채지 않는다.

퇴근 후 파트너와 함께 동네 시장에서 장을 봤다. 자주 가는 두부 가게 아저씨가 오랜만이라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는 파트너를 향해 남자친구냐고 물었다. 순간 당황했다. 난 “아뇨, 애인이에요.”라고 답했고, 파트너는 조용히 있었다. 어려웠다. ‘아뇨. 여자친구예요’라고 답했어야 했을까. 내 정체성뿐만 아니라 파트너의 정체성까지 알려지는 일인데 싶었다. 혼자 있었을 때 남성으로 패싱됐다면 가만히 있지 않았을 파트너가 침묵하고 있었던 것도 마음에 걸렸다.

익명성. 어떤 행위를 한 사람이 누구인지 드러나지 않는다는 의미다. 여기에는 확실한 자유로움이 있다. ‘레즈비언 걔’에서 ‘레즈비언 64316435’이 된다는 건 마치 움츠러들어 있던 몸을 크게 기지개를 펴는 일처럼 느껴졌다. 동시에 익명성은 위험하고 불안했다. 언제 깨질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얼음판을 걷는 기분이기도 했다. 그리고 외로웠다. 기회가 된다면 서로의 얼굴을, 표정을, 하루를 알아채고 싶었다. 그런데 다시 ‘걔’로 돌아갈까봐 두렵다. 경멸과 혐오의 대상인 걔.

“커밍아웃과 아웃팅 사이의 수많은 스펙트럼, 즉 공간상에서 자신을 얼마만큼 드러내고(혹은 강제로 드러내지고) 또 감출 것인가(혹은 타의로 감춰질 것인가)의 전략은 성적 반체제자들의 일상생활과 생존에 직결되는 문제이다. 집, 거리, 학교, 직장, 화장실과 같은 여러 공간들에서 성적 반체제자들은 매순간 드러냄(드러내지기)과 감추기(감춰지기)의 경계 사이에 있다.”(김현철(2015) 성적 반체제자와 공공 공간: 2014 신촌/대구 퀴어퍼레이드를 중심으로, 서울대 교육학석사 학위논문)

누구에게 얼마나 드러낼(드러내질) 것인지에 대한 건 익명의 관계에서는 필요치 않게 느껴진다. 어차피 고유한 존재로 인식되지 않으니깐. 그런데 조금이라도 상대방을 고유한 존재로 인식하면 그때부턴 늘 그 경계에서 고민할 수밖에 없다. 두부가게 아저씨에게도 고민이 드는데, 하물며 매일매일 출근해서 함께 일하는 동료에게는? 아무리 ‘이 사람은 친구가 아니야’, ‘그냥 덩어리처럼 일하자’ 해도 누군가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고 그 사람이 고유한 존재가 되는 순간, 자꾸만 나도 그 사람에게 고유한 존재가 되고 싶은 욕망이 올라온다. 들려주고 싶고, 가닿고 싶다. 연결되고 싶다.

드러냄과 드러내지기. 그리고 숨기기. 이 사이를 끊임없이 넘나든다. 익명의 존재로 있고 싶은 마음과 고유한 존재로 관계 맺고 싶은 마음. 이 모든 것들이 한 사람의 몸 안에서 동시에, 폭발적으로 일어난다. 참지 못하고 몸 밖으로 삐져나올 때도 있고, 아예 몸이 산산조각 나서 흩어져버리기도 한다. 조각을 모아 다시 몸을 이룬다. 새로 이어붙인 몸으로 출근길에 오른다. 동료와 인사를 나누고, 옆자리에 있는 무지개 플래그를 보면서 이야기하고 싶은 욕망이 올라온다. 다시 부서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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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우리는 같이 잘 살 수 있다

칼럼

▲ 김세정(소순) 퀴어동네 운영위원

시골에 사는 우리 외할머니에게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동네 길고양이들 밥 주는 일이다. 할머니 집 근처에서 지내는, 가족으로 추정되는 고양이 네댓 마리가 밥 손님이다. 커다란 화분 받침대를 물그릇으로, 딸기 사면서 온 플라스틱 대야를 밥그릇으로 삼아 챙겨주는데, 할머니에게 ‘밥’이란 곧 ‘쌀’을 의미하기에 주로 쌀밥을 준다. 고양이는 육식동물이라 안 먹을 법도 하지만, 언제 또 배불리 먹을지 몰라서인지 곧잘 먹는다. 고양이들도 할머니를 잘 따른다. 할머니가 마당에 나오면 꼬리를 바짝 세우고 할머니 다리에 몸을 비비거나 바닥에 뒹굴며 애교를 부린다. 그게 예쁜지 얼마 전 할머니는 고양이들 먹인다며 장에서 ‘개 사료’를 한 포대 사기도 했다.

할머니가 원래 고양이를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짐작하기로 할머니의 변화는 이모 가족이 입양한 강아지 ‘또또’ 덕분인 것 같다. 그동안 할머니와 살았던 동물은 소, 닭, 오리, 거위 같은 ‘가축’이 대부분이었고, 오래전 마당에 살던 개가 그나마 가까웠다. 팔십 평생 동물이란 밖에서 사는 게 당연했기 때문에, 또또가 처음 왔을 때 할머니는 “개를 무슨 방에서 키우냐”라고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또또를 안아주고, 놀아주고, 배변을 치워주고, 간식도 제일 많이 주며 극진히 모신다. 또또와 지내보니 지나가던 고양이에게도 관심이 생겼고, 눈에 들어오니 쫓아내지 않고 밥을 주게 된 게 아닐까 싶다.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존재를 알아보고 자신의 공간에 들여 서툴지만 정성껏 대하는 할머니의 모습은 신기하고 감동적이다.

여론조사 회사 한국리서치가 지난해 6월 진행한 ‘2024 성소수자 인식조사’ 설문조사에 따르면 주변 지인 중 성소수자가 있는지가 성소수자에 대한 태도에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응답자 1천 명 중 성소수자 지인이 있는 사람 중 43%가 성소수자에게 호의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답했고, 성소수자 지인이 없는 사람은 13%만이 호의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답했다. 적대적인 감정은 반대였다. 성소수자 지인이 있다면 26%가, 없다면 46%가 성소수자에 적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응답했다. 성소수자에게 호의적일 것이라 느껴 성소수자 당사자가 커밍아웃해 성소수자 지인을 두게 된 경우가 많겠으나, 어떤 경로로든 지인을 통해 성소수자 존재를 인지하고 선입견과 오해가 사라져 호의적으로 변한 경우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를 확인하는 것부터 어렵다. 2023년 6월 퀴어노동권포럼에서 진행한 ‘커밍아웃의 조건 찾기 실태조사’에서 성소수자 직장인 64.1%가 직장에서 커밍아웃하지 못했다고 응답했다. 할머니네 고양이들에게서 ‘나’를 숨기는 사람들이 떠오른다. 이제는 마당을 자유롭게 오가고 집 앞 밭 한가운데서 한가로이 장난도 치지만, 할머니가 보살피기 전까지 고양이들은 조그만 인기척에도 놀라 달아나기 바빴다.

커밍아웃할 수 없는 직장인들도 마찬가지다. 성소수자와는 같이 살 수 없다는 동료들 사이에서 언제 다칠지 몰라 불안해하며 언제든 도망칠 준비를 해야 한다. 오해받고 험담을 들어도 아닌 척 거짓말하며 움츠러들어야 한다. 살기 위해서는 일터를 떠날 수 없기에, 있어도 없는 사람이 되어 버틴다.

성소수자에 대한 적대감은 알지 못함에서 비롯된 막연한 감정일 수 있다. 개는 방에 들어올 수 없다던 할머니 같은 시기가 나에게도 있었다. 여고 동급생끼리 연애하면 큰일 나고, 남성 간의 로맨스는 아이돌 팬픽에나 존재하는 환상이며, 거리를 걷는 저 이가 트렌스젠더일 수 있다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아마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실수를 했을 것이다. 다양한 사람과 사건을 거쳐 경험의 폭이 넓어지며 생각도 달라졌다. 이상하거나 잘못된 사람은 없었고, 주어진 삶을 치열하게 살아내는 사람만이 보였다. 우리를 가로막는 건 성별 정체성이나 성적 지향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없으리라’라는 편견이라는 걸 깨달았다.

같이 산다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와 다른 누군가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부터 시작하면 된다. 없다고 생각하면 쉽게 차별하게 된다. 있음을 인정하면 보이고, 보이면 어떻게 해야 같이 잘 살 수 있을지 상상하게 된다. 우리는 이미 성소수자 동료와 일하고 있다. 고양이에게 쌀밥과 개 사료를 챙겨주는 것처럼 곁을 내어줄 마음만 있다면 어설프더라도 함께 살아갈 수 있다. 실수하고 배우며 같이 살자. 달라도 같이 살 수 있더라.

퀴어노동법률지원네트워크 (qqdong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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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공에 휘날린 무지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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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이 퀴어동네 운영위원

서울퀴어문화축제 부스 준비에 한참이던 어느 날, 우리는 고공농성 투쟁3사인 서비스연맹 관광레저산업노조 세종호텔지부, 금속노조 한국옵티컬하이테크지회 및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와 연대하는 한 시민의 이메일을 받았다. 고공 3사 투쟁 사업장에는 500일 넘게 장기 고공농성 중인 한국옵티컬하이테크지회가 있는데, 국민 청문회 개최를 위한 동의수가 부족해 노동자의 벗과 퀴어동네가 운영하는 부스에 국민동의청원 홍보 포스터를 붙일 수 있냐는 정중한 요청이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에 흔쾌히 수락하며 연대의 차원에서 퀴어동네의 깃발 역시 고공농성 투쟁3사 행진트럭인 1번 차량을 따라가기로 했다. 그런데 해당 요청에 대해 검토를 진행하며 기시감이 들어 곰곰히 생각해보다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이미 서울퀴어문화축제에서 세종호텔지부의 해고자를 만난적이 있었던 것이다.

3년 전 수습노무사모임인 ‘노동자의 벗’ 이름으로 서울퀴어문화축제 부스를 준비하며 우리는 하나의 참여 이벤트를 준비했다. “나는 퀴어친화적인 직장을 원하는 000 입니다”라는 피켓인데, 공란에 본인을 소개하는 자유로운 문구를 넣어 인증샷을 찍을 수 있게 했다. 그 당시 찍은 수많은 인증샷 중에는 “나는 퀴어친화적인 직장을 원하는 (세종호텔 정리해고) 해고자 입니다”가 있었다.

2021년 12월9일 코로나19에 따른 경영위기를 이유로 돌입한 구조조정으로 해고된 세종호텔 해고노동자들은 지난 3년간 서울퀴어문화축제를 찾아줬다. 2023년에는 “피어나라 퀴어나라 세종호텔 해고노동자도 지지합니다”라는 피켓으로 연대하며 소소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러나 그 사이 해고노동자들의 상황은 악화했다. 2024년 12월께 중앙노동위원회에 이어 대법원 역시 해고가 정당하다고 판결함에 따라 고진수 세종호텔지부장은 스스로를 고공으로 내몰았다. 호텔 경영은 흑자로 돌아섰지만, 해고노동자들은 3년 넘게 일터로 돌아가지 못한 것이다.

한동안 잊고 살았던 세종호텔 해고자들을 서울퀴어문화축제에서 다시 만났다. 3년 전 노동자의 벗에서 퀴어동네로 모임을 발족한 뒤 다시 참여할 때까지 수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그 사이 고공농성 중인 사업장은 3개로 늘어나 나아지기는커녕 악화한 현실이 씁쓸하기만 했다.

그러나 3년 사이의 변화는 나쁜 것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부스 곳곳에 한국옵티칼하이테크 청문회 개최를 위한 국민동의청원 홍보 포스터가 붙어있었고, 서울퀴어문화축제 입구 한켠에서는 국민동의청원을 위한 홍보가 한창이었다. 축제의 메인인 퍼레이드에서는 고공 3사의 투쟁트럭이 선두에 섰다. 서울퀴어문화축제에서는 매해 가장 상징적인 단체의 차량이 퍼레이드 선두에 서는데, 올해는 그 자리에 “퀴어와 노동자의 연대”를 상징하는 고공 3사의 차량이 선 것이다.

퀴어퍼레이드의 행진 역시 생소하지만 뜻깊었다. 선두 트럭에서는 퀴어와 엘라이들의 심금을 울리는 대중가요가 아닌 해고노동자들의 복직을 기원하는 민중가요가 울려 퍼졌다. 퀴어퍼레이드 행렬에는 한화빌딩 앞에서 김형수 한국옵티컬하이테크지회장이 춤으로 환영의 인사를, 세종호텔 앞에서는 약 3분간 정차해 고진수 지부장에게 연대의 뜻을 전했다. 퀴어와 해고노동자가 고공에서 만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연대에 힘입어 국민동의청원은 단 이틀 만에 1만 명 이상이 동참해 결국 지난 16일 국회 회부 기준인 5만명을 넘겼다. 광장에서의 연대가 고공 위의 삶을 흔든 것이다.

퀴어문화축제는 더 이상 ‘퀴어’만을 위한 축제가 아니다. 서로 다른 존재들이 서로를 향해 깃발을 들 수 있는 정치적 광장이다. 해고노동자의 고공 위 외침과 퀴어퍼레이드가 교차하는 이 만남은 우리가 더 넓은 연대를 상상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고공의 깃발과 광장의 무지개가 함께 나부낄 때 변화는 시작된다. 고립된 싸움은 없다. 더 많은 이들이 서로의 광장에, 서로의 고공에 함께 한다면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퀴어노동법률지원네트워크 (qqdong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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